출범 8년간 해운·물류기업에 17.5조원…중소선사 선박금융 9146억원
팬스타 미라클 선가 80% 금융조달…엔화 전환으로 연 17억원 절감
한일항로 환적 비중 68%…조각투자 등 중소선사 자금조달 창구 확대
[헤럴드경제(오사카)= 김선국 기자] 선박 한 척에 수백억원이 필요한 해운업에서 자금력이 부족한 중소선사에 ‘새 배’는 높은 문턱이다. 한국해양진흥공사가 보증을 통해 2만2000톤(t)급 크루즈페리 건조를 뒷받침하고, 취항 이후에는 달러화 대출을 엔화로 바꿔 연간 17억원의 금융비용까지 낮췄다. 해진공은 이 같은 중소선사 금융지원을 앞으로 5년간 1조1000억원 규모로 확대한다.
10일 해진공에 따르면 부산과 일본 오사카를 오가는 ‘팬스타 미라클’의 선가는 7050만달러다. 팬스타가 선가의 20%인 1410만달러를 자체 자금으로 부담하고 나머지 80%인 5640만달러를 금융기관에서 조달했다. 해진공은 이 가운데 95%인 최대 5358만달러, 약 750억원의 채무를 보증했다.
팬스타 미라클은 국내 조선소에서 건조된 최초의 크루즈페리다. 당시 국내에서 대형 크루즈페리를 건조한 선례가 없어 민간 금융만으로 새 배를 짓는 데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어려웠다는 게 해진공의 설명이다. 해진공은 2022년 12월 달러화 대출에 대한 채무보증을 지원했다. 팬스타 미라클은 지난해 4월 인도돼 부산~오사카 항로에 투입됐다.
배를 띄운 뒤에는 대출 통화도 바꿨다. 해진공은 지난달 팬스타 미라클의 달러화 대출을 금리가 더 낮은 엔화 대출로 바꾸는 재금융을 지원했다. 해진공이 엔화로 채무보증을 제공한 첫 사례다.

지난달 말 기준 달러화 대출의 기준금리는 3.80%, 엔화 대출은 1.56%였다. 약 700억원의 남은 대출금을 기준으로 조달금리가 2.5%포인트 이상 낮아졌다. 이에 따라 팬스타가 부담하는 이자비용은 연간 약 17억원, 남은 보증기간 4년 동안 약 70억원 줄어들 것으로 해진공은 추산했다.
팬스타가 부산~오사카 항로에서 엔화로 돈을 번다는 점도 활용했다. 화물과 여객 운송으로 벌어들인 엔화를 원화나 달러로 바꾸지 않고 엔화 대출을 갚는 데 바로 쓸 수 있다. 환율 변동에 따른 위험과 환전 비용을 함께 줄이는 구조다. 배를 지을 때 돈을 빌릴 수 있도록 보증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취항 이후 실제 영업 상황에 맞춰 금융조건까지 바꾼 셈이다.
팬스타 미라클은 해진공이 정책금융의 지원 대상을 중소선사로 넓히는 사례 중 하나다. 해진공은 2018년 출범 이후 올해 6월 말까지 해운·물류기업에 누적 17조5000억원의 금융지원을 승인했다. 선박 구입뿐 아니라 경영 안정과 친환경 선박 전환, 항만·물류 분야 등으로 지원 범위도 넓혔다.
대형 원양선사에만 지원이 집중된 것도 아니다. 해진공에 따르면 HMM을 제외한 금융지원 규모가 12조7000억원에 달한다.
배종윤 해진공 ESG성과팀장은 “HMM을 제외하고도 12조7000억원을 지원했다”며 “앞으로 중소·중견선사 등으로 산업의 파이를 넓히는 지원을 이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중소선사의 선박 확보 지원이 늘고 있다. 해진공은 출범 이후 중소선사 28개사의 선박 65척에 9146억원을 지원했다. 2018~2021년에는 27척에 2985억원을 지원했지만 2022년부터 올해 5월까지는 38척에 6161억원을 공급했다. 지원액이 이전 기간보다 106% 늘었다. 이 가운데 3887억원은 2022년 도입한 제1차 중소선사 특별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공급됐다.

중소·근해선사의 역할은 한일항로에서 두드러진다. 세계 해운시장의 운임이 크게 출렁이는 동안에도 한일항로의 운임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었다.
해진공이 자체 개발한 컨테이너운임지수(KCCI)를 토대로 2024년 1월부터 올해 8월까지 분석한 결과 미국 서안항로의 운임은 한 주에 평균 7.59%씩 오르내렸다. 한일항로의 변동폭은 1.39%에 그쳤다. 이 기간 가장 비쌀 때와 쌀 때의 운임 차이도 미국 서안항로는 4.34배에 달했지만 한일항로는 1.42배였다.
그 배경에는 부산항을 거쳐 세계 각지로 오가는 환적화물이 있다. 환적은 배에 실린 화물을 중간 항구에서 다른 배로 옮겨 최종 목적지로 보내는 방식이다. 올해 상반기 한일항로에서 오간 화물 컨테이너는 112만3364TEU로 집계됐다. TEU는 20피트짜리 컨테이너 1개를 뜻한다. 이 가운데 약 68%가 부산항에서 다른 배로 갈아타 세계 각지로 향하거나 반대로 해외에서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가는 물량이다.
이런 환적화물은 글로벌 선사와 장기간 반복적으로 거래하는 물량이 많아 운임이 급격하게 오르내리는 것을 완화하는 역할을 한다는 게 해진공의 분석이다.
일본의 항만 구조도 영향을 미친다. 일본은 화물이 여러 항만으로 나뉘어 들어가는 반면 부산항에는 대규모 물량이 집중된다. 부산항의 2024년 컨테이너 처리량은 2440만TEU로 도쿄·요코하마·고베·나고야·오사카 등 일본 5대 컨테이너항을 모두 합친 1562만TEU보다 약 1.56배 많았다. 부산과 일본 각 지역 항만을 자주 오가는 중소·근해선사가 필요한 이유다.
정경남 해진공 기획조정실 차장은 “일본은 톨비가 굉장히 비싸고 트럭도 부족해 여러 비용 구조가 한국보다 높다”며 “일본 지역 화주 입장에서는 도쿄나 오사카를 거치는 것보다 부산을 이용하는 것이 비용이나 서비스 측면에서 유리한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해진공은 중소선사가 배를 확보하는 데 필요한 금융지원을 더 늘린다. 지난 6월 ‘제2차 중소선사 특별지원 프로그램’을 마련해 앞으로 5년간 1조1000억원을 지원할 계획이다. 기존 중소선사뿐 아니라 최근 2년 이내 중소기업이었던 신규 중견선사까지 지원 대상을 넓혔다. 예선업과 도선업도 지원 대상에 포함했다.
선박 가격의 최대 80%까지 금융지원의 기준으로 인정하고 투자와 보증은 각각 선박 한 척당 최대 400억원까지 제공한다. 신용등급에 따라 금리도 0.3~0.6%포인트 낮춰준다. 사업성이 있는지를 외부에서 검토받는 비용도 건당 최대 1000만원 지원한다.
운영에 필요한 자금에 대한 이자 지원도 한다. 해진공이 추천한 중소선사가 IBK기업은행에서 자금을 빌리면 연 2%의 이자를 최대 3년 동안 지원한다. 대출한도는 국제항로를 운항하는 선사가 30억원, 국내 항로 선사가 10억원이다.
은행 대출이나 보증 이외의 자금조달 방식도 추진한다. 대표적인 것이 ‘선박 조각투자’다. 쉽게 말해 선박 한 척에 여러 투자자가 나눠 투자하도록 해 선사가 배를 마련할 수 있는 새로운 자금줄을 만드는 방식이다. 해진공은 금융당국의 관련 제도 정비에 맞춰 첫 시범사업을 오는 11월 한국거래소(KRX)에 상장하는 것을 목표로 추진하고 있다.
배 팀장은 “전통적인 선박금융은 은행이 돈을 빌려주고 보증기관이 보증해 대출을 일으키는 방식”이라며 “조각투자가 활성화되면 선사 입장에서는 자금 조달 창구가 더 늘어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해외에서는 공공기관이 선사와 함께 배를 소유해 초기 부담을 낮춰주는 방식도 활용한다. 일본 철도건설·운수시설정비지원기구(JRTT)는 선사와 함께 선박을 건조하고 공동으로 소유하는 제도를 운영한다. 선사가 처음부터 선박 가격 전액을 마련하지 않고 공공기관과 비용을 나눠 부담하는 방식이다.
다만 국내에서 일본식 공동소유 제도를 도입하기로 결정한 것은 아니다. 해진공은 현재 투자와 보증, 이자 지원에 더해 조각투자 등으로 중소선사가 돈을 구할 수 있는 통로를 넓히고 있다.
팬스타 미라클에 대한 약 750억원의 보증은 배 한 척에서 시작됐다. 이후 달러화 대출을 엔화로 바꿔 이자 부담을 낮추는 지원으로 이어졌다. 해진공은 이런 정책금융을 중소·연안선사 전반으로 넓힌다는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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