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멀쩡히 병원에 걸어 들어갔던 환자가 ‘오후’에는 싸늘하게 식어서 돌아옵니다. 가족들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불가능에 가까운 ‘싸움’을 시작합니다. 적금을 깨고, 집을 팔아 마련한 돈은 ‘환자가 왜 죽었는지’를 밝히기 위해 쓰입니다. 하지만 환자와 가족이 의료기관의 책임을 입증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정보의 비대칭성’ 때문입니다.
국내에서 의료분쟁은 크게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을 통한 조정·중재 신청(연평균 약 2100건), 민사소송(연평균 약 1000건·보험연구원 연구자료) 등을 통해 이뤄집니다. 매해 ‘3000건 이상’의 의료분쟁이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처럼 펼쳐지고 있습니다.
헤럴드경제는 법무법인 오킴스와 함께 다양한 의료분쟁 판례를 분석하고, 다윗이 어떻게 해야 골리앗을 이길 수 있을지 톺아보려 합니다. 환자와 환자 가족들이 ‘메디컬 생존 게임’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응원합니다. 메디컬 생존 게임은 월 2회(격주 화요일) 연재됩니다. [편집자 주]
[헤럴드경제=고재우 기자] 항암 치료에만 전념하면 될 줄 알았다. 아니었다. ‘네 차례’ 항암 치료도 버거웠던 A씨에게 ‘다섯번째’ 항암 치료는 재앙이었다.
지난 2020년 4월 23일 찾았던 서울대병원에서 항암 치료는 이전과 달랐다. 앞서 석 달 동안 네 차례 받았던 항암 치료와 달리 간호사가 정맥(카테터 삽입)을 확보하지 못했다. 몇 차례 실패가 반복되자 해당 간호사는 동료에게 간호사에게 항암제 주입을 위한 정맥 주사를 부탁했다. 이후 A씨에게 항암제 아드리마이신이 주입됐다.
정맥 주사 부위에 붓기는 없었으나 발적(피부가 벌겋게 붉어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같은 날 A씨 오른쪽 다리에 정맥 주사를 통해 항암제 도세탁셀, 시클로포스마이드 등이 연이어 투여됐다.
문제는 발생한 건 다음날부터였다. 전날 아드리마이신 투약 뒤부터 해당 부위와 주변부에 심한 통증과 함께 붓기가 찾아왔다.
서울대병원 의사는 혈관 외 유출 손상 의증으로 진단하고, 염증 조절을 위해 스테로이드(경구약 및 연고), 항생제 등을 처방했다. 쉽게 말해 혈관으로 흘러야 할 항암제가 살로 새어 나간 것이다. 이 경우 단순 염증을 넘어 피부가 괴사할 가능성도 있다.
A씨가 느끼는 고통은 점차 심해졌다. 통증, 붓기는 물론, 어깨, 팔·다리 등으로까지 증상이 번졌다. 오른쪽 손목 자기공명영상(MRI) 촬영 결과, 신전건 건초염을 동반한 봉와직염이 확인됐다.
신전건 건초염이란 손가락 혹은 발가락을 펴주는 힘줄에 염증이 발생했다는 뜻이다. 종양내과와 감염내과 협진 결과, 감염내과 의사는 A씨 증상이 약물에 의한 염증일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성형외과에 절개 및 배농 술을 고려해야 할지 회신하기도 했다.
결국 A씨는 복합부위통증증후군(CRPS) 2형 진단을 받았다. CRPS 2형은 신경이 직접적으로 손상돼 스치기만 해도 칼에 베이는 듯한 극심한 통증이 지속되는 ‘희귀 난치성 질환’이다.
A씨 “의료진, 주의 및 설명 의무 위반”
A씨와 서울대병원 간 지난한 줄다리기가 시작됐다. A씨는 서울대병원 의료진이 ▷의료상 주의의무 ▷설명의무 등을 위반했다고 주장했다. 이를 근거로 ‘약 4억7000만원’을 청구했다.
우선 의료상 주의의무 위반이다. 정맥 주사 삽입으로 인한 항암제 혈관 외부 유출과 이로 인한 피부 괴사 등을 문제 삼았다. 의사가 직접 정맥 주사를 통해 항암제를 투여해야 하고, 부득이하게 간호사가 수행하는 경우라면 항암제 투여 시간 동안 환자 징후를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의사 입회).
담당 간호사가 네 차례에 걸쳐 정맥 주사를 삽입하지 못한 점도 꼬집었다. 해당하는 상황을 의사에게 보고 후, 상세 지시를 받아 정맥 주사 삽입 및 항암제를 투여해야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담당 간호사에게 부탁받은 다른 간호사가 항암제를 투여했고, A씨는 ‘이전과 달리’ 손목 부위 혈관에 항암제를 맞았다(정맥 주사 삽입 과정).
특히 항암제 투여 직후, 정맥 주사 부위에 발적이 발생한 것을 두고, 의사에게 보고했어야 한다고 했다. 항암제 혈관 유출이 의심됨에도 불구하고 잔류 항암제 제거 등 후속 조치가 이뤄지지 않아 종양내과, 피부과, 감염내과, 성형외과, 재활의학과 등에서 진료를 받았고, 부적절한 치료 및 치료 지연으로 상태가 악화했다는 게 A씨 입장이다(항암제 혈관 외 유출에 따른 대처).
의료진 설명의무 위반은 CRPS 2형 발생 가능성에 대한 설명이 없었다는 점을 들었다. 항암제 투여 시 다리 부위에도 정맥 주사를 할 수 있다는 설명을 통한 환자 선택권 보장도 문제 삼았다.
법원 “A씨 주장, 모두 받아들일 수 없다”
서울중앙지방법원(판사 이유빈)은 A씨 주장을 모두 물리쳤다. 의료상 주의의무 및 의료진 설명의무 위반을 모두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세부적으로 ▷의사 입회 ▷정맥 주사 삽입 과정 ▷항암제 혈관 외 유출에 따른 대처 등 모두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항암제 투여를 위해 의사가 정맥 주사를 삽입하고, 항암제 투여 장소에 입회하는 등 의료상 주의의무에 대하는 ‘의학적인 근거’가 없다고 했다. 오히려 항암제 투여 시 경과 관찰 등은 간호사 업무라고 봤다.
정맥 주사 삽입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정맥로 확보에 실패했다고 하더라도, 이 사실 자체가 담당 간호사 의료상 주의의무를 위반했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했다. 동료 간호사를 통해 정맥 주사를 삽입한 행위에 대해서도 의료상 주의의무 위반이 아니라고 봤다.
항암제 혈관 외 유출에 따른 대처에 대해서도 담당 간호사 등이 항암제 아드리마이신 혈관 외 유출을 의심하고, 이를 전제로 어떤 조처를 했어야 할 의료상 주의의무가 있지 않다고 판단했다. A씨가 의료상 주의의무를 주장한 전제 자체를 부정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정맥 주사가 혈관 내가 아닌 다른 곳에 삽입됐다면 항암제 투여 시작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큰 통증과 함께 발적, 부종 등이 발생하고, 항암제 주입 속도가 떨어지거나 멈췄어야 한다고 했다. 혈관 외에 정맥 주사 삽입은 없었다는 취지다.
특히 항암제 혈관 외 유출이 잘못된 정맥 주사 삽입에 따른 것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고 판단했다.
법원은 “항암제 혈관 외 유출은 1000명당 1명 내지 60명까지 생길 정도로 흔한 부작용”이라며 “카테터가 정상적으로 삽입돼 정맥 내에 잘 유지됐다고 해도 완전한 밀폐 상태가 아니고, 혈관 외 유출이 발생하지 않게 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표준 지침이 확립돼 있지 않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항암제의 혈관 외 유출이 발생했다는 사정만으로 병원 의료진의 의료상 주의의무 위반을 추정할 수도 없다”고 덧붙였다.
설명의무 위반에 대해서도 의료진이 항암 치료에 관한 설명의무를 이행해 A씨 자기 결정권이 보장됐다는 점, 정맥 주사 삽입 부위에 대한 설명 필요성이 부족하다는 점, 항암제 투여 시 혈관 외 유출로 인한 CRPS 2형 발생 예견이 어렵다는 점 등이 인정됐다.
조진석 변호사 “의료 과오 소송 법리 재확인”
조진석 법무법인 오킴스 변호사는 A씨 재판에 대해 의료과오소송 법리를 재확인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A씨에게 CRPS 2형이 발생했다는 사실 만으로 의료진의 과실을 인정하기란 어렵다는 것이다. 특히 혈관 외 유출이라는 결과를 넘어 의료진의 대응에 대해 문제 제기에 나설 것이라면 ‘진료기록감정’이 더욱 중요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조 변호사는 “해당 사건은 항암 화학요법 과정에서 발생한 항암제의 혈관 외 유출과 그로 인한 것으로 주장된 CRPS 2형에 관해 법원이 의료진의 과실과 인과관계를 부정하고, A씨의 청구를 기각한 사례”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법원은 혈관 외 유출이라는 결과가 발생했다는 사정만으로 의료진의 과실을 추정할 수는 없다고 했다”며 “이는 환자가 직면한 최악의 결과를 의료진 과실에 의한 것이라고 평가하지 않는다는 의료과오소송의 기본 법리를 재확인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구체적으로 조 변호사는 “법원은 정맥 주사 삽입과 항암제 투여 및 경과 관찰이 표준적으로 간호사의 업무 영역에 속한다는 점을 근거로 의사의 주의의무를 부정했다”며 “고도로 전문화된 임상 의료 현장에서 의료행위의 분업 구조와 임상 현실을 고려한 판단”이라고 말했다.
설명의무 이행에 대해서도 “법원은 항암 치료 전 혈관 외 유출로 인한 피부 조직 괴사 가능성 등을 포함한 포괄적 설명이 이뤄져 환자의 자기 결정권이 실질적으로 보장됐다고 본 것”이라며 “CPRS 2형에 관한 판단도 설명의무 대상이 ‘당해 의료행위로 통상 예견되는 위험’에 한정된다는 판단 법리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A씨로서는 혈관 외 유출이라는 결과 발생을 넘어 ▷잔료기록감정 등을 통해 유출 당시 의료진의 경과 관찰과 대응이 임상 표준에 미치지 못했다는 점 ▷해당 과실과 CRPS 2형 사이 의학적 인과관계 여부를 진료기록 감정 등을 통해 규명해야 했다는 점 등이 중요했다”고 부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