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열강 그레이트 게임의 각축장이 된 쓰시마
일본에서 존왕양이 세력이 도쿠가와 막부 타도를 기치로 들고 일어나 정국이 극심한 혼란에 빠져 있던 무렵인 1861년 3월 14일, 러시아의 중국해역 함대사령부 소속 군함 포사드니크호가 돌연 일본 쓰시마 아소만에 상륙한 뒤 숙영지와 포대를 설치하고 일대를 무력으로 점거했다. 그리고 쓰시마 도주에게 이 지역을 해군기지로 사용하겠다는 뜻을 밝히며 영구 임차를 요구했다. 쓰시마 도주 소 요시요리는 러시아군의 불법 점령에 불복하여 이들에게 즉시 퇴거할 것을 요청했으나 러시아군은 막무가내로 버텼다.
쓰시마번은 이런 상황을 즉시 막부에 보고하고 대책을 마련해 주도록 요청했으나 막부는 자체적인 힘만으로는 이 사태를 수습할 능력이 없었다. 러시아 군대를 물리칠 만한 무력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때 일본을 위한 구원투수가 등장했다. 막부의 실력자, 안도 노부마사는 은밀하게 세계 최강국 영국의 주일공사 올코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자 올코크는 영국 극동함대사령관 제임스 호프 소장을 일본에 불러들여 대책을 논의한 뒤 영국 군함 두 척을 쓰시마로 파견하여 위력 시위를 통해서 러시아 군함의 퇴각을 요구했다. 여차하면 동아시아에서 영국과 러시아 사이에 무력 충돌이 일어날 상황이었다. 그러나 영국의 강한 압박에 형세가 불리함을 감지한 러시아는 쓰시마 점령 6개월 만에 철수했다(‘러시아 군함 쓰시마 점령 사건’).
러시아는 18세기 이래 부동항을 찾아 남진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이런 러시아의 남진 정책은 흑해 크림반도 등지에서 영국에 저지당하며 번번이 패배를 거듭하고 있었다. 이를 ‘그레이트 게임’이라고 부른다. 이 게임의 한복판에 동아시아의 쓰시마가 열강의 각축장으로 떠오른 것이다.
러시아 쓰시마 점령 사건, 정한론으로 비화
러시아의 쓰시마 점령 사건은 일본 국내외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올코크 공사는 이 사건을 계기로 도쿠가와 막부의 한계가 명확히 드러나자 기존의 막부 지지에서 반막부파 세력인 사쓰마번과 조슈번 쪽으로 돌아서 메이지 유신을 막후에서 지원한다. 국내에서는 러시아를 가상 적국으로 설정하고 군비 증강을 추진하게 된다.
특히 외세의 공격에 노출된 쓰시마가 받은 충격은 엄청났다. 이를 계기로 가신 오시마 도모노조가 중심이 된 존왕양이파가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고, 같은 성향인 조수번(현 야마구치현)과 ‘쓰조동맹’을 맺었다. 또한 이들은 만약 러시아 등 서구 열강의 손에 의해 조선이 점령당하면 이웃인 일본에도 큰 위협이 되므로 이를 사전에 방지하려면 ‘일본이 먼저 선수를 쳐서 조선을 침공해 정복해야 한다’라는 논지의 ‘정한론’을 주장했다.
도모노조는 동지, 조슈 출신 반막부 세력의 핵심인 기도 다카요시에게 이 논리를 내세워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 성공했다. 도쿠가와 막부가 멸망하고 메이지 정권이 들어서자 신정권의 실력자로 부상한 다카요시는 초기에 가장 강경하게 정한론을 주장한 인물인데 그의 정치적 영향력으로 인해 도모노조와 같은 사람들이 내세운 관념론적 정한론은 점차 현실성을 띠면서 메이지 정권 외교 노선의 근간으로 자리를 잡았다.
대원군의 강공책
쓰시마는 산이 많고 경지는 3%도 되지 않아서 조선과의 무역을 통해 경제를 지탱하고 있었다. 식량은 특히 전적으로 조선과의 무역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동안 쓰시마번은 조선 조정의 쌀 지원과 조선과의 교역을 독점하는 특권을 누리며 재정을 유지해 왔으나 도쿠가와 막부가 1858년 서구 열강과 통상조약을 맺고 문호를 개방하자 조선의 대원군은 “일본은 서양 오랑캐와 다를 바 없다. 일본인과 접촉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라며 쓰시마와의 교역을 규제하자 쓰시마의 경제는 곤궁에 빠졌다.
다시 살길을 모색해야만 했던 쓰시마번은 막부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쓰시마 방어 문제는 단지 쓰시마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라 일본 전체의 운명이 걸린 현안이므로 이를 담당할 인력과 재원이 필요하다는 명분을 내세워 막부에 쌀 3만석의 지급과 무기 및 군함의 대여를 요청했다. 그러나 사실 외세의 침공에 대비한다는 것은 표면적인 명분일 뿐 막부의 자금을 지원받아 궁핍한 재정 상태에서 하루빨리 벗어나는 일이 그들의 속내였다.
쓰시마의 ‘배은망덕’
조선 조정은 쓰시마 번주에게 예조참의(현 차관보급) 격의 관직과 식량을 제공해 왔으며 외교 창구를 쓰시마 번주로 단일화하여 힘을 실어주었다. 이처럼 조선 조정은 쓰시마에 수많은 공을 들이고 덕을 베풀었으나, 흥선대원군의 쓰시마 교역 규제로 인해 궁지에 몰린 쓰시마번은 정한론을 주장하게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흥선대원군의 완고함과 인색함이 일본의 조선 침략을 불러온 요인 가운데 하나로 보인다.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었더라면, 구한말 망국의 조선 역사는 바뀌었을지도 모른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조선왕조실록(정조실록 6권)의 기록이 새삼 역사의 아이러니함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저들 또한 곤궁한 처지에 이르게 되면 반드시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 것인데, 가령 일단 왜구가 총을 들고 육지로 상륙하게 되면, 지금 동래·부산처럼 허술한 방어로 잘 막아낼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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