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 일본 패망 후
배편으로 귀국길에 오른 한국인들.
[부산시 자료]
1945년 8월 15일 일본 패망 후 배편으로 귀국길에 오른 한국인들. [부산시 자료]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망하자 조선 땅에 있던 일본인들은 부산항으로 몰려들어 황망히 일본으로 귀국길에 올랐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부산행 화물선을 타고 일본에서 한국으로 들어온 아홉 살 일본인 소년이 있었다. 그는 그해 8월 6일, 미군의 히로시마 원폭 투하 당시에 폭탄이 폭발한 지점에서 불과 460m 떨어진 곳에서도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고아 소년이었다. 이번 회에서는 바로 그 소년인 도모다 쓰네히로가 한국인 ‘김형진’으로서 겪은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아홉 살 소년과 그를 외면한 친척들

“쓰네히로, 용케 살아 있었구나” 히로시마시청에서 배급한 주먹밥을 먹고 있는데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기 집 2층에 세 들어 살며 군화공장에 다니던 한국인 가네야마 사부로 아저씨였다. 아저씨의 성은 김 씨였는데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다. 쓰네히로는 미군의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로 가족을 모두 잃고 고아 신세가 되었다. 그는 어머니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히로시마 곳곳에 설치된 구호시설과 시신 안치소를 헤매다가 우연히 가네야마 아저씨를 만난 것이다. 이때 그는 “지옥에서 부처님을 만난 기분이었다”고 한다.

가네야마는 쓰네히로의 외할머니 집을 찾아가 그를 맡기려고 했으나, 외할머니는 냉담한 반응을 보이며 끝내 손자를 외면했다. 쓰네히로는 일본에서 자신을 거두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직감하자 두려움이 밀려왔다. 가네야마 씨가 귀국을 서두르자 자기도 따라가겠다며 그를 졸랐다. 그해 9월, 이들은 부산으로 향하는 화물선에 몸을 실었다. 배 안은 해방의 기쁨에 들떠 고국으로 돌아가는 조선인들로 붐볐다. 쓰네히로를 태운 배는 현해탄을 건너 부산항에 도착했다.

학생들에게 히로시마 원폭의
참상을 증언하는
도모다 쓰네히로.
[출처 : 야후재팬 화상]
학생들에게 히로시마 원폭의 참상을 증언하는 도모다 쓰네히로. [출처 : 야후재팬 화상]

쓰네히로, 한국 소년 ‘김형진’이 되다

두 사람은 화물열차를 타고 서울에 올라와 가네야마 씨의 형님 집에 잠시 몸을 의탁했다. 당시에는 반일 감정이 고조되어 있던 시기라서 가네야마 형님은 쓰네히로가 일본인이라는 걸 숨기기 위해 김형진이란 한국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런데 가네야마가 잠시 고향에 있는 어머니를 만나러 간다면서 38선을 넘어 황해도로 가서 한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쓰네히로는 가네야마 가 없는 집에 머무는 것이 눈치가 보이자 가출을 감행했다.

한편 가네야마는 쓰네히로를 데리고 가려고 서울로 와서 백방으로 행방을 수소문했으나 찾지 못하자 다시 북으로 올라갔다고 한다. 그 이후에 쓰네히로와 가네야마의 만남은 영영 이뤄지지 못했다. 38선이란 분단의 벽이 세워져 남북 간의 인적 왕래가 끊겼기 때문이라고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어린아이에게 무슨 죄가 있겠느냐”라고 감싸준 양봉녀 아주머니…남편은 일본군에게 학살당해

쓰네히로가 낮에는 영등포시장에서 잡일을 하고 밤에는 길거리 노숙을 하며 지내던 어느 날이었다. 시장에서 장사하는 양봉녀라는 아주머니가 그를 자기 집에 와서 함께 살도록 배려해주었다. 그녀의 남편은 일본군에게 학살당했다고 한다. 쓰네히로가 일본인 고아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녀는 “어린아이에게 무슨 죄가 있겠느냐”라며 쓰네히로를 감싸줬다.

홀몸으로 네 명의 자녀를 키우는 양 씨 아주머니네 형편이 너무 어려워 쓰네히로는 더 이상 짐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그 집을 나왔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양 씨 가족과는 한동안 소식이 끊겼다가 전쟁이 끝나자 양 씨 아주머니 가족과 재회했다. 쓰네히로가 일하는 영등포시장 빵 가게와 양 씨 아주머니의 시계 가게가 서로 근접해 있었기 때문이다.

도모다 쓰네히로가 일본으로 귀국한 시기인
1960년대 초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 청과시장 전경.
[서울시 자료]
도모다 쓰네히로가 일본으로 귀국한 시기인 1960년대 초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 청과시장 전경. [서울시 자료]

15년 만의 가슴 벅찬 귀향

어느 날 꿈에 어머니가 나타나서 “얘야, 어서 집으로 돌아오너라”라고 말했다. 쓰네히로는 그날부터 히로시마로 돌아가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귀국할 방도를 찾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생활하는 동안 한국인 ‘김형진’으로 살아왔기에 일본어는 모두 잊어버린 상태였다. 그러자 일본어를 할 줄 알았던 양 씨 아주머니가 쓰네히로의 사진과 함께 모친과 조모의 이름 등을 적은 편지를 일본어로 써서 일본 관공서 등 30여 군데에 보내주었다.

편지를 보내고 4년이 지난 어느 여름날이었다. “여기에 도모다 쓰네히로라는 일본사람이 있나요?”라고 물으며 서울시청 직원이 빵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일본에 보낸 편지 가운데 한 통이 히로시마시청을 통해 쓰네히로 할머니에게 전달되었다고 한다. 할머니의 친족 관계가 확인되자 히로시마시청은 서울시청에 쓰네히로의 호적등본을 보내 그가 일본인이라는 사실을 통보했다.

그때부터 그의 귀국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마침내 가슴 벅찬 귀향길에 올랐다. 아홉 살 어린 소년이 한국인 ‘김형진’으로 살아가다 15년 만에 고향 땅을 다시 밟은 것이다. 쓰네히로는 한국에서의 생활을 회상하며 “자기들 먹을 양식도 없는데 나를 먹여주고 재워준 가네야마 아저씨와 양 씨 아주머니는 내 생명의 은인이다”라며 눈시울을 적셨다.

그는 요즘 학생들 앞에서 원폭 피해의 참상을 증언하며 ‘평화 전도사’로 활동하고 있다. 한민족에게는 상대방을 용서하고 약자에게 덕을 베푸는 똘레랑스(너그러움)의 정서가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다. 필자는 이런 우리 민초들이 자랑스럽다.


anju1015@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