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코인·위안화 통행료 결제

‘기뢰회피’ 목적 대체항로 발표

이란이 미국과의 휴전 합의 후에도 세계 핵심 에너지 수송로인 호르무즈 해협 통제를 유지하면서 하루 통과 선박 수를 약 10여척 수준으로 제한하는 방안을 추진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또한 통항 선박들은 기뢰를 피해 좁은 대체항로를 따라야 하는 리스크도 안게 됐다. ▶관련기사 2면

월스트리트저널(WSJ)은 8일(현지시간) 아랍권 중재자들을 인용해 이란이 최근 체결된 2주간의 휴전 기간에도 이 같이 선박 통행을 엄격히 제한하고 통행료를 부과할 계획을 밝혔다고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이란은 호르무즈 해협을 지나는 선박이 자국 정예 군사조직인 이슬람혁명수비대(IRGC)와 사전 조율을 거치도록 요구하고 있다. 통과 선박은 사전에 통행료를 협의한 뒤 암호화폐나 중국 위안화로 비용을 지급해야 한다.

같은날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도 이란 석유·가스·석유화학 제품 수출업자연합 대변인 하미드 호세이니를 인용해 “이란은 해협을 통과하는 모든 유조선으로부터 통행료를 징수하고, 각 선박을 개별적으로 검사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호세이니는 “이란은 이 2주 동안 무기 운송이 이뤄지지 않도록 해협을 드나드는 물자를 감시할 필요가 있다”며 “모든 선박이 통과할 수는 있지만, 절차에 시간이 걸릴 것이며 이란은 서두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해협 통과 조건은 이란 최고국가안보회의(SNSC)가 결정한다. 호세이니는 유조선이 통과하려면 먼저 화물 정보를 당국에 이메일로 제출해야 하며, 이후 이란이 디지털 통화로 지불할 통행료를 통보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통행료가 배럴당 1달러이며, 빈 유조선은 무료로 통과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또 “이메일 접수 후 이란의 평가가 완료되면 선박은 몇 초 안에 비트코인으로 결제해야 하며, 이는 제재로 인해 추적되거나 압류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란이 통항 선박의 무기 수송 여부를 살펴본다며 선박 검열에 나서면,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선박은 하루 10척 정도로 제한될 것으로 보인다. 해양 리스크 분석업체 EOS 리스크의 마틴 켈리 자문 책임자는 “현재 (페르시아만에) 대기 중인 선박을 2주 안에 모두 처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절차가 매우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하루 약 10~15척 정도만 통과할 수 있을 것”이라 전했다. 이는 전쟁 이전 하루 약 135척이 해협을 통과했던 것에 비하면 10분의 1도 안되는 수준이다.

호르무즈 해협 통행량은 지난 2월 28일 전쟁 개시 이후 급감했다. 에너지 정보업체 S&P 글로벌 마켓 인텔리전스에 따르면 휴전 선언 직후인 이날도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한 선박은 4척에 불과해, 전쟁 이전 하루 약 135척이 오가던 것과 비교할 수 없다.

선박 운항 경로도 제한된다. 통과가 허용된 선박들은 기존 항로 대신 이란 게슘섬과 라라크섬 사이, 이란 연안을 따라 오만만으로 빠져나가는 좁은 통로를 이용해야 한다. 로이터 통신은 이란 이슬람혁명수비대(IRGC)는 이날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선박이 이용해야 할 해협 내 대체항로를 발표하고, 선박들에 ‘가이드맵’을 제공했다고 보도했다.

이는 해협 내 이란이 설치한 기뢰를 피하기 위해서다. IRGC는 성명에서 “페르시아만과 호르무즈 해협의 군사적 긴장 상황과 다양한 기뢰에 접촉할 위험을 고려해, 해협을 통과하려는 모든 선박은 추후 통지가 있을 때까지 혁명수비대 해군과 조율하고 대체 항로를 이용해야 한다”고 밝혔다.

전격적인 휴전 합의로 호르무즈를 둘러싼 긴장이 완화되는 듯했지만, 발표 후에도 이스라엘의 레바논 공습 지속과 이란 측의 ‘보복 검토’ 소식이 전해지면서 해협 통행은 다시 중단된 상태라고 현지 매체들은 전했다.

이란 국영 프레스 TV는 이날 휴전 발효 후 일시적으로 열렸던 호르무즈 해협이 전면 폐쇄되면서 해협을 통과하려던 유조선들이 급격히 뱃머리를 돌리고 있다고 보도했다. 해상 항적 추적 데이터에 따르면, 해협 출구를 향해 운항하던 파나마 선적 유조선 ‘오로라(AUROURA)호’가 이날 오만 무산담 연안 인근에서 갑자기 항로를 변경해 180도 돌아선 뒤, 페르시아만 깊숙한 곳으로 회항했다. 회항이 이뤄진 곳은 이란의 라라크 섬과 무산담 반도 사이로, 에너지 수송이 집중되는 곳이자 지정학적 중요성이 매우 높은 전략적 요충지다. 이곳에서 유조선이 통행을 포기하고 회항했다는 것은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됐다는 뜻이다.

모하마드 바게르 갈리바프 이란 의회 의장은 이날 X(엑스·옛 트위터)에 “미국 대통령도 인정했듯 이란의 10개항 제안은 ‘협상의 실행 가능한 기반’이자 이번 협상의 주요 틀”이라며 “그러나 지금까지 이 제안의 3개 조항이 위반됐다”고 주장했다.

이란 관영 매체는 이날 페르시아만 라반섬에 있는 정유소가 정체 불명의 적들에 의해 피격됐다 보도했다. 이에 대해 미국과 이스라엘은 모두 자국 소행이 아니라고 부인했지만, 이란의 우라늄 농축은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란은 이스라엘의 레바논 공습에 대해 보복할 것이라 경고했다.

한편 미국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란과 합작법인(조인트벤처)을 설립해 호르무즈 해협 통행료를 공동 징수하는 구상을 언급하는 등 해협 통행료 징수는 용인할 수 있다는 입장을 내비쳤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ABC 방송과의 통화에서 “우리는 이(통행료 부과)를 합작사업(joint venture)으로 진행하는 방안을 생각해보고 있다”며 “이는 해협을 보호하는 동시에 다른 많은 세력으로부터 해협을 지키는 방법이 될 수 있다. 그건 정말 훌륭한 일”이라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에 앞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미국은 호르무즈 해협의 통행 정체 해소를 도울 것이다. 많은 긍정적인 조치들이 있을 것이며 큰 수익이 만들어질 것”이라 게시하기도 했다. 이어 “이란은 재건 절차를 시작할 수 있다”고 덧붙여 호르무즈 해협 통행료를 전쟁 피해 복구 비용으로 쓰겠다는 이란의 계획을 수용할 수 있다는 취지의 언급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SNS 게시물에서 이란의 요구안을 ‘사기(fraud)’라 칭하면서 “미국이 수용할 수 있는 의미 있는 항목은 단 하나뿐이며, 이번 협상 기간 동안 비공개로 논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를 두고 미국이 협상할 ‘의미 있는 항목’이 이란이 전후에도 호르무즈 해협 통제권을 유지하겠다는 요구 사항을 일정 부분 수용하는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이는 국제법 위반이라는게 국제 사회의 공통된 지적이다. 유엔해양법협약(UNCLOS)에 따르면 자연 해협에 해당하는 호르무즈는 인위적으로 개설한 운하와 달리 통행료 부과가 허용되지 않는다. 미국과 이란은 모두 해양법 협약을 비준하지 않았다. 그러나 프랑스 해양법 협회 회장 쥘리앵 레노는 뉴욕타임스(NYT)에 “비준하지 않았다고 해서 이란이 해협에서 완전한 행동의 자유를 갖는 것은 아니다”라며 “이란은 여전히 국제법과 관습적인 통항권의 적용을 받는다”고 지적했다. 파리 소르본 대학교의 해양법 전문가 필리프 델베크 교수 역시 “바다는 누구의 소유도 아니라는 생각에 기초한 항행의 자유는 수백 년간 기본권으로 인정되어 왔다”며 “만약 호르무즈 해협이 폐쇄되거나 유료화된다면 지브롤터 해협이나 말라카 해협은 왜 안 되겠느냐. 이는 국제 사회의 종말과 다름없다”고 비판했다.

한편, 휴전안이 하루만에 무산 위기에 처하자 이를 제안했던 셰바즈 샤리프 파키스탄 총리는 SNS에 “분쟁 지역 여러 곳에서 평화 프로세스의 정신을 훼손하는 휴전 위반 행위들이 보고되고 있다”며 “외교가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모든 당사국이 합의된 대로 2주간의 휴전을 존중하고 극도의 자제력을 발휘해 줄 것을 간절하고 진심 어린 마음으로 당부한다”고 촉구했다.

도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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