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주 전 외교부 국제안보대사
이현주 전 외교부 국제안보대사

3년 만에 치러지는 6·3 대통령 선거는 역사상 가장 혼란스러운 선거가 될 것 같다. 대통령 탄핵의 여파가 여전하고 나라밖은 더 혼돈의 세상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으로 유럽과 중동이 요동치고 인도와 파키스탄도 한판 붙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는 독재의 축을 구축하며 이웃을 위협한다. 북한의 김정은도 덩달아 날뛰려 한다.

냉전 후 평화적 국제질서와 다자간 자유무역이라는 예측가능한 국제적 신뢰체제는 사실상 붕괴됐다. 정치지도자에 대한 존경과 신뢰도 무너졌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취임 직후부터 관세폭탄을 난사하며 미국과 세계를 뒤흔들었다. 그러나 미국이 중국에 대한 관세를 145%에서 30%로 낮춘 폭만큼이나 트럼프의 ‘협박외교’도 허풍이 돼간다. 이제 한국 대통령의 신뢰도가 국내외적으로 검증될 차례다. 신뢰는 정치와 외교의 근본이다.

신뢰는 능력과 진실성에 달려있다. 능력이 없으면 아무리 진실해도 신뢰받지 못한다. 경제는 결과가 정책능력을 입증한다. 반면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진실성이 없으면 동티난다. 국민에게 약속을 지키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 정치적 신뢰의 기준이다. 국민 스스로 정치권력의 신뢰성을 판단하는 것이 민주주의다. 민주주의국가의 외교는 일정한 투명성이 유지되고 약속이 지켜질 것이라는 믿음을 준다. 반면 독재나 포퓰리즘 권력은 공포와 위협을 동원해 국민을 기만하고 신뢰를 강요한다. 국민이 침묵하고 순종하면 독재권력은 거짓을 감추고 진실을 왜곡한다. 대외침략이나 도발, 위기조성은 그런 상태가 외교에 반영된 것이다. 그래서 독재권력의 외교는 신뢰받지 못한다.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pacta sunt servanda)는 라틴어 법언은 기본적인 외교전문용어다. 신뢰는 서구사회의 질서와 외교의 근간이었다. 토머스 홉스는 ‘리바이어던’에서 약속(계약)의 종류와 개념, 이행 책임을 상세하게 기술하고 약속을 이행하는 질서의 감시자를 구약성서의 욥기에 나오는 괴물인 ‘리바이어던’에 비유했다. ‘리바이어던’은 강하고 공정한 왕권을 의미했다.

오늘날 국제질서를 사실상 보장해온 패권국인 미국이 반드시 공정한 것은 아니다. 자신에게 유리한 가치나 규범을 강요하다가도 파기하기도 한다. 약소국들은 어쨌든 순응해야 한다. 반면 약소국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고통과 손실이 따른다. 그래서 약소국에게는 외교의 옳고 그름을 이념으로 미리 예단하는 외교정책은 적합하지 않다. 힘없는 선의는 신뢰를 보장할 수 없다.

한국에게는 강대국의 의도를 분석하고 대처하는 귀납적인 외교기술이 더 중요하다. 대통령이 천재적인 외교전략가나 ‘리바이어던’은 아니다. 대통령이 허황된 언동을 하고 ‘이념꾼’과 ‘폴리페서’들이 파는 거대외교담론에 현혹되거나, 국내정치 분열로 정권교체 때마다 외교정책이 오락가락하면 주변 강대국들에게 오히려 이용당하기 쉽다. 그래서 대통령의 외교는 국민의 통합적 지지가 필수다. 다음 대통령은 취임 직후 초당적 외교안보정책협의체(가칭)를 만들어 과거의 정책을 되새겨 새로운 외교정책 지지기반을 다지고, 애국적 외교기술자를 잘 활용하고, 외교안보조직과 생태계를 혁신하기를 바란다. 그것이 곧 한국외교의 힘이다.

이현주 전 외교부 국제안보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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