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매년 2월이 오면 특별한 전화 한 통을 받는다. 지난 10여 년간 이어 온 전화의 주인공은 올해 아흔을 맞이하는 노영탁 선생이다.

노 선생은 독립운동가 계원 노백린(盧伯麟, 1875~1926) 장군의 손자다. 며칠 전에도 어김없이 통화를 했는데 오는 21일 국립서울현충원에서 노백린 장군 제99주기 추모식이 열리니 참석해 달라는 소식이었다. 1993년 상해 만국공원묘지에서 노백린 장군을 포함한 임시정부 요인 다섯 분의 유해가 국립서울현충원으로 봉환됐을 때부터 추모식을 열어 왔는데, 2009년까지는 묘역에서 추모식을 열었고 지금은 겨울철 날씨를 감안해 현충관에서 개최하고 있다.

최근 몇 년간 추모식에 참석하면서 노 선생 가족들의 헌신에 늘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유족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도리를 할 뿐이라고 말씀하시지만, 정초부터 보훈 관련 기관·단체와 협의하고, 종친과 친지에게 참석을 부탁하고, 교회의 목사님과 성도들이 추모 예배를 집전케 하고, 황해도 도민회와 공군군악대를 초청하고, 정성과 진심을 담아 손님들을 맞이하는 모습이 눈에 선해서다.

노 선생 가족분들이 항공 관련 전시행사에 내빈으로 초대받아 오시거나, 지인들을 모시고 박물관을 방문할 때가 있다. 박물관에는 노백린 장군과 관련한 작은 전시 코너가 있고 야외에는 여섯 명의 한인 청년들과 함께 비행복을 착용하고 있는 노백린 장군의 동상이 전시돼 있기 때문이다. 이 동상은 1920년 4월 27일 자 ‘독립신문’에 게재된 사진을 바탕으로 제작된 조형물이다.

다시 독립신문을 찾아 지면을 살펴본다. 사진은 프로펠러 복엽비행기를 배경으로 7명이 비행복을 착용하고 나란히 서 있다. ‘대한이 처음으로 가지는 비행가 6인’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가운데 노백린 군무총장을 중심으로 한장호, 이용근, 이초, 이용선, 오림하, 장병훈 등의 청년들이 함께하고 있다. 그해 2월 5일 상항(桑港, 샌프란시스코) 비행기 학교에서 촬영했고 노 총장이 이동휘(1873~1935) 총리에게 시를 보냈다고 부연하면서 한시(漢詩) 한 편도 싣고 있다.

“군마를 타고 몇 년 만에 헛되이 이름을 얻으니(戎馬多年浪得名)/ 부끄럽게도 나 오늘 간성이 되었네(愧吾今日作干城)/ 해양 삼만리를 돌파하고파(欲破海洋三萬里)/ 바람을 타고 시험 삼아 먼저 비행기를 타네(御風先試航空行)//”

1919년 미국 망명 중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군무총장으로 취임해 독립군 양성을 위해 순회하던 중 레드우드 비행학교에서 한인 청년들을 만났고, 비행기라는 신문물을 활용한 독립운동의 의지를 시로써 표현하고 있다. 그는 대한제국의 관비 유학생으로 파견돼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지만 친일의 편린은 눈을 씻고도 찾을 수 없고, 군무총장과 국무총리를 역임하며 1926년 이국땅에서 큰 별로 스러졌다.

67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유해는 현충원 임시정부 묘역에 안치됐고 ‘국무총리 노백린의 묘’라는 묘비가 서 있지만, 그는 여전히 장군으로 불릴 뿐이다. 진정한 무관의 길을 묻는다면 그의 길을 좇으면 된다. 추모식을 맞이하며 하늘 높이 순항하는 장군의 항공행(航空行)을 염원해 본다.


sun@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