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김광우 기자] ‘바로 가져다 쓸 수 있을 거 같은데’
본격적인 가을 이사철이 시작된 요즘, 주택가 골목이나 아파트 단지 분리수거장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이 있다.
바로 무더기로 버려진 가구들. 책상부터 의자, 서랍장, 소파 등 다양한 종류의 가구들이 버려져 있지만, 산산이 부서진 모습은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
조금만 손보면, 바로 사용할 수 있는 가구들. 하지만 막상 ‘고쳐 쓰기’를 선택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는 물건을 수리해 쓰려는 의향이 해외보다 낮게 나타났다. 다만, 한국인들이 새 것을 좋아해서 발생하는 문제라고 단정하기는 힘들다.
고치려고 해도 어디서 고쳐야 할지 모르는 데다, 수리할 곳 자체도 부족하기 때문. 특히 가구나 전자제품처럼 일상에서 흔히 사용하는 물건일수록 상황은 더 심각한 것으로 분석됐다.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유로모니터 인터내셔널이 지난 2023년 약 4만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지속가능성 설문조사에 따르면 글로벌 응답자의 약 40%는 고장 난 물건을 새 제품으로 교체하는 대신 ‘수리’를 택한다고 밝혔다.
반면 같은 조사 데이터를 활용한 한국 보고서에서는 새 제품을 구매하기보다 물건을 수리하는 것을 선호한다는 한국 소비자 응답이 21%에 그쳤다. 글로벌 응답 비율의 절반 수준이다.
그렇다고 단순히 한국 소비자들이 ‘새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막상 물건을 고쳐 쓰려고 해도 비용과 부품, 수리 방법 등 곳곳에 장벽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A/S가 간편한 대기업 전자제품 외 다양한 생활용품에 대한 수리 장벽이 높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소비자원이 국민 1만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2025 한국의 소비생활지표’를 보면 지속가능한 소비를 방해하는 요인 중 ‘비싼 수리 비용’이 56.7점으로 나타났다. ‘수리 방법의 어려움’은 52.5점, ‘수리 부품 없음’은 51.4점 등이었다.
단순히 소비자 편의로 인해 새 제품을 구매하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 실제 수리 경험이 많은 품목 또한 스마트폰(20.7%), 냉장고ㆍ김치냉장고(13.6%), 에어컨(11.0%) 순으로 한정돼 있었다. 비교적 수리 시스템이 잘 갖춰진 대기업 상품 등을 위주로 수리 경험이 나타난 셈이다.
수리할 권리는 지속가능한 폐기물 정책에 있어 주요 사항 중 하나다. 현행 ‘순환경제사회 전환 촉진법’도 이를 명확히 규정하고 있다. 관련법은 내구성이 우수한 제품의 생산과 제품 수리 등을 통해 수명을 연장함으로써 폐기물 발생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명시한다.
이에 현 정부 또한 123대 국정과제 가운데 ‘순환경제 생태계 조성’에 한국형 에코디자인 도입과 함께 ‘제품의 수리 용이성 평가 제도화’를 포함한 바 있다.
수리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제품을 수리하기 쉽게 만드는 것뿐 아니라, 실제 소비자가 수리를 선택할 수 있는 환경도 필요하다. 수리비가 제품값보다 비싸거나 제조사 수리망이 닿지 않는 저가 제품, 가까운 수리점이 없는 지역에서는 민간시장만으로 수리 접근성을 확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각 지자체는 공공 수리서비스 정책을 운영하고 있다. 서울에서 확인된 공공 수리·수선 사업 종류만 총 126개. 숫자를 보면 적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지역을 막론하고 다양한 물건을 쉽게 수리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면 얘기는 달라진다.
최근 서울환경연합과 자원순환사회경제연구소는 서울시공익활동지원센터의 지원을 받아 시민조사단 33인과 함께 서울시 25개 자치구 수리·수선 인프라와 수리권 보장을 위한 공공지원 체계를 평가한 결과를 발표했다.
서울환경연합은 조사 결과 보고서를 통해 “시민이 생활권에서 다양한 물건을 쉽고 지속적으로 고쳐 쓸 수 있는 서울시 25개 자치구의 수리 환경은 아직 충분히 갖춰지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자전거는 서울 25개 자치구 모두에서 수리가 가능했다. 장애인 의료보조기기도 23개 자치구, 우산은 19개 자치구에서 관련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상에서 흔히 사용하는 물건으로 범위를 넓히면 선택지는 급격히 줄었다. 장난감을 수리할 수 있는 곳은 7개 자치구에 불과했고 전자제품과 의류·신발은 각각 4개 자치구에서만 공공 수리 서비스가 확인됐다.
가구는 더 심각했다. 25개 자치구 가운데 가구 수리가 가능한 곳은 성동구 단 1곳에 불과했다.
아울러 전체 126개 사업 중 27개가 동 주민센터나 아파트, 지역 거점 등을 순회하는 이동형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해당 사업의 경우 운영 일시와 장소를 사전에 확인해야 하는 등 이용에 제약이 있었다.
정보를 찾기도 어려웠다. 수리할 곳이 존재한다고 해도 이를 찾는 것부터 쉽지 않다는 것.
25개 자치구 가운데 관련 정보를 온라인에서 쉽게 확인하고 예약·신청까지 할 수 있다고 평가받은 곳은 양천구 1곳뿐이었다. 19곳은 프로그램과 기본 정보는 확인할 수 있지만 예약이나 정확한 이용 가능 여부를 알기 위해 다시 연락해야 했다.
자치구별 차이도 적지 않았다. 서울환경연합은 수리 관련 조례, 정보 접근성, 이용요금 등 9개 항목을 평가해 점수(100점 만점)를 산출했다. 그 결과, 25개 자치구 가운데 마포구가 73점으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다. 반면 가장 낮은 강서구는 46.4점으로 1위와 26.6점의 격차가 벌어졌다.
더 큰 문제는 이렇게 운영되는 수리 사업이 실제 쓰레기를 얼마나 줄이고 있는지조차 알기 어렵다는 점이다. 25개 자치구 가운데 각종 수리·수선 사업을 ‘자원순환과 폐기물 감축’이라는 공통 목표 아래 통합적으로 관리하는 곳은 단 한 곳도 없었다.
사업마다 이용자 수와 수리 건수, 운영 횟수 등을 제각각 집계하고 있을 뿐이다. 물건을 고쳐 사용하면서 실제 폐기물이 얼마나 줄었는지 평가할 공통 성과지표도 마련돼 있지 않았다.
서울환경연합은 조사에 참여한 시민들 사이에서도 “좋은 수리 프로그램이 있어도 홍보가 부족해 아는 사람만 이용한다”,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으로 운영돼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고 설명했다.
이에 서울환경연합과 자원순환사회경제연구소는 서울 곳곳에 흩어진 수리·수선 정보를 한곳에 모은 ‘고치맵 서울’을 제작해 공개했다. 자전거와 우산, 의류·신발, 장난감, 전자제품 등 품목별로 가까운 수리 장소와 관련 정보를 찾아볼 수 있도록 했다.
서울환경연합 관계자는 “시민들의 수리점 이용 경험과 관련 정보를 계속 추가하고, 서울시와 자치구에 상설·정기 수리공간 확대와 수리 품목 다양화, 지역 수리업체·사회적기업과의 협력, 통합 정보체계 마련 등을 요구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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