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4>인정사정 볼 것 없다 (29) 글 채희문 / 그림 유현숙
귓속말을 주고받은 후에 그녀의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니 기가 막혔다. 서늘한 눈매에 우수까지 담겨있었으니 까짓 방송사 상무 나부랭이가 반하지 않을 재간이 없을 터였다. 대단한 미인이로구나… 그만하면 됐다.
“팬티를요? 저 손님 팬티를 훔쳐오라고요?”
혜미라고 했나? 그녀는 까르륵 웃고 나서 자신 있다는 투로 술잔을 들어 건배를 외쳤다. 까짓 방송사 상무 바지 벗기는 일쯤이야 애호박에 침놓기란 표정이었다.
“그런데요, 회장님. 저 손님을 밤새 정성껏 모시는 것이 제 의무이니 기꺼이 그렇게 하겠는데요… 팬티는 왜 훔쳐야 돼요?”
혜미는 아직도 웃음을 참을 수 없다는 듯 입을 가린 채 속삭였다.
“그걸 무작정 훔쳐선 안 되지. 그 팬티 위에 너와 저 양반의 서명을 동시에 받아와야만 해.”
“서명? 팬티에 저 손님과 내 이름을 써 오라고요? 무엇으로요? 매직펜으로?”
“그렇지. 자필 서명을 받아오면 너에게 100만 원을 주마. 사랑의 서약을 받아오면 더욱 좋지. 그렇게 해준다면 200을 주지.”
“팬티에? 팬티 위에 사랑의 서약을 받아요?”
“쉿, 조용히 해라. 저 양반 들을라. 거 왜 옛날 기생들은 양반들과 하룻밤 정을 나눈 후에 치마폭에 사랑의 서약을 받았다고 하지 않던? 치마를 펼쳐놓고 먹을 갈아서 구구절절 사랑의 서약을 쓰도록 한 뒤에 서명을 받아 평생 보관했다고 하더라. 그 얼마나 운치 있고 멋진 모습이냐? 그걸 우리도 흉내 내보자는 말이야. 허허허!”
“어머, 멋져요, 회장님. 제가 오늘 밤에 꼭 서약을 받아올게요.”
하하 호호, 낄낄 깔깔! 밴드음악이 흐르고, 부어라 마셔라 하며 웃고 떠드는 동안에 유민 회장과 혜미라는 아가씨는 이렇게 요상한 계약을 맺고야 말았다. 혜미에겐 신선한 장난거리였을지 몰랐다. 그러나 유민 회장으로서는 결코 심심풀이를 위해 벌인 짓거리가 아니었다. 그건 방송사 상무의 코를 확실히 꿰어놓기 위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만약에 술 취한 상태로 괴발개발 써놓은 글씨는 무효다. 확실하게 너와 저 양반의 자필로 서명해야 하고 글씨는 누구라도 잘 알아볼 수 있어야만 하는 거야. 그래야 200만 원을 줄 수 있어.”
이렇게 다짐을 한 뒤에야 유민 회장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노래를 부를 때에도 이왕이면 신나게, 바짓단을 걷고 넥타이를 풀어헤친 채 열창을 해 대었다. 회장이란 사람이 격의 없이 논다고? 그건 유민 회장의 속내를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그는 지금 술 마시고 노는 것이 아니라 3,000억 원을 회수하기 위한 막중한 사업에 뛰어들고 있는 중이었다.
‘이름 석 자가 담긴 팬티를 확보하기만 하면… 흐흐흐!’
이런 생각만 하면 유민 회장은 제풀에 흥이 나서 덩실덩실 춤이라도 출 기세였다. 옛말에 ‘논인어색주지외(論人於色酒之外)’라고 했다. 군자를 논할 때엔 술과 여자에 관한 일은 모른 체 한다는 뜻이리라. 가히 군자다웠다. 그러나……
‘당신은 내 꼭두각시가 되는 게요, 상무님.’
유민 회장은 이렇게 속으로 중얼대며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를테면 남녀의 공동 자필서명이 담긴 팬티는 무소불위의 힘을 지닌 무기로 둔갑될 것이 뻔했다. 그 팬티를 슬쩍 내보이며 ‘랠리 중계 좀 똑바로 하세요, 상무!’ 하고 말하면 상무는 낯빛이 하얗게 질린 채 명령에 복종할 것이 눈에 훤했다. 자필서명 된 팬티를 슬쩍 내보인다는 것은 더 이상 까불면 당신의 불건전한 애정 행각을 만천하에 까발리겠다는 뜻과 같았다.
“자, 상무님. 신나게 노시고… 오늘 밤엔 저 아가씨와 회포를 푸시지요. 예로부터 논인어색주지외라 하지 않았습니까? 젊은 여자와 진하게 놀아 보십시다.”
술잔을 가득 채운 유민 회장은 방송사 상무와 러브샷을 하며 이렇게 외쳤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