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확 前총리 아들’ 꼬리표 떼고…공직생활땐 ‘자유로운 영혼’ 아이콘…이제 STX 미래 10년 짊어진 CEO로…그의 열정적 삶과 에너지

경기고 시절 싸움짱에 성적은 전교 1~2등 다퉜지만

아버지에겐 늘 모자란 아들

인정받기 위해 안간힘 쓴 반항의 사춘기

서슬 퍼런 5공 정권의 골프금지령에도

‘자비로 즐기면 부끄러울 것 없다’ 소신 행보

김현식·송창식 곡 직접 부른 음반 제작도

공직 머물며 소비자보호법·방통융합법 등 성과 지금도 뿌듯

남들은 날 기인이라 불렀지만 튀지않게 지냈다고 자부

퇴직후 로펌 고문 제안 ‘뒷방 늙은이’ 신세 싫어 거절

선거때면 쏟아지는 정치권 러브콜이

공직 생활 ‘최대 위기’ 결코 정치엔 뜻 없다

집무실에서 만난 신철식 STX 미래연구원장(부회장)은 예전보다 한결 여유 있어 보였다. 전직 경제관료에서 기업인으로 변신한 지 1년. 사제밥(?)이 좋긴 좋은가 보다. 전보다 안색이 밝아지고 표정도 생기가 넘친다. 트레이드 마크인 ‘올백 머리’에 회색 정장으로 멋을 낸 신 부회장은, 그의 성격처럼 시야가 시원하게 트인 자신의 집무실에서 반백년을 지내온 자신의 삶에 대해 담담히, 그러나 때로는 격정적으로 풀어나갔다.

▶불우한 어린 시절 “꿈을 꿀 여유가 없었다” 신 부회장에게는 별칭이 많다. ‘공직사회의 자유로운 영혼’ ‘베스트 드레서’ ‘풍운아’ 등등. 풍류와 멋을 알고, 한군데에 얽매이길 싫어했던 신 부회장에게 모두 썩 잘 어울리는 별칭들이다.

하지만 신 부회장의 인생을 통틀어 그를 가장 짧지만 굵게 규정했던 단어는 바로 ‘고(故) 신현확 전 총리의 아들’이다. 부친이 워낙 거물 관료, 정치인이다 보니 신 부회장은 자신이 관직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전까지 신 전 총리의 아들로 살아야만 했다.

그렇다고 부친이 일찍부터 요직에 있었던 덕분에 신 부회장이 유년시절을 ‘온실 안의 화초’로 자랐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신 부회장 스스로도 “유년시절은 사실 행복하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1학년 때 4ㆍ19가 터지면서 당시 자유당에서 관료를 했던 영감(신 전 총리)이 스스로 서대문 형무소로 가셨어요. 그때 분위기로 우리 가족은 모두 영감이 사형당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때문에 집안 분위기가 어두울 수밖에 없었어요.”

이때 모친인 고(故) 김혜배 여사는 장남인 신 부회장이 약해지는 것을 경계해 모질 정도로 엄격한 가정교육을 했다. 당시 신 부회장의 집에는 ‘매 6종 세트’가 있어 잘못의 경중에 따라 회초리의 종류도 달라졌다고 한다.

특히 신 전 총리가 형무소로 들어갔을 때, 김 여사는 아들과 함께 마당에서 이불을 깔고 자기도 했다. 당시 형무소는 난방이 제대로 안 될 만큼 시설이 열악했는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장남은 아버지의 고충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신 부회장은 모친의 엄격한 가정교육 때문에 근 1년이나 마당에서 칼잠을 자야 했다.

학교에서도 괴롭기는 매한가지였다. 부친이 이승만 정권의 주적으로 꼽히다 보니, 학교에서는 ‘주적의 아들’로 놀림을 받으며 따돌림을 당했다. 그래서 신 부총리는 또래 아이들에게 무시를 당하지 않으려고 공부든 주먹이든 뭐든 지지 않기 위해 열심히 했다고 한다. “유년시절은 꿈을 꿀 여유가 없을 정도로 치열하게 살았다”고 회상할 정도다.

덕분에 전교에서 성적이나 주먹으로나 신 부회장을 이길 수 있는 동년배는 없었다. 자연히 또래 아이들이 신 부회장을 따르게 되면서 반장이나 회장 직을 도맡게 됐다.

▶학창시절 “아버지에게 나를 증명하는 과정” 신 부회장은 예상과 달리 반항적인 학창시절을 보냈다. 학교에서는 그를 모르면 간첩일 정도로 유명인사였지만, 유독 집에서는 그의 뛰어남을 인정하지 않았다. 교내 최고의 싸움짱에 공부도 경기중 수석입학, 경기고와 서울대 상대 졸업 등 초일류 엘리트 코스만 밟아왔건만 신 전 총리를 비롯해 신 부회장의 집에서는 그가 두각을 드러낼수록 더 많은 것을 요구했다.

“학교에서 전교 1~2등을 다툴 정도로 공부도 잘했고 노래 같은 잡기에도 두각을 보였지만 부친에게 나는 늘 모자란 아들이었습니다. 덕분에 학창시절에는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 아니라 ‘나는 아버지 생각과 달리 이만큼 능력 있는 사람이다’고 증명하는 데 더 안간힘을 썼던 것 같습니다.”

집안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고위 공직자인 아버지의 후광 때문에 신 부회장의 활약상이 오히려 부각되지 못한 부분도 있다. 신 전 총리의 아들이니 당연히 그 정도는 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식이었다. 이에 신 부회장은 늘 아버지의 크고 깊은 그늘에서 벗어나는 것이 숙제였다. 아버지는 늘 ‘거역과 반역의 대상’이었고, 그러다 보니 반항적인 사춘기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신 부회장은 아버지와 같은 공직의 길을 선택하게 된다. 아버지뿐 아니라 선대 조부도 대한제국 시절에 공무원을 지내다 보니, 집안식구들이 모이기만 하면 사적 이익보다 국민이나 정책 등 공익(公益)에 대해 논의하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이뤄졌던 것이다. 덕분에 신 부회장은 자신도 모르게 우리나라의 근현대 경제정책을 꿰게 됐다.

“대학 때 진로를 결정해야 할 시기가 왔는데, 사기업 취업을 빼고 평소에 흥미가 없었던 법관을 빼고 나니 남는 건 공직밖에 없더라고요. 평생 아버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결국 그 자리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버지의 밥상머리 교육이 생각보다 대단했던 모양입니다.(웃음)”

▶공직사회에 입문 “나답게 일하는 것이 최선. 하지만…” 지난 1979년 공직에 입문한 신 부회장은 공직사회의 분위기에 매몰되기보다는 소신을 갖고 ‘나답게(?)’ 일하자고 다짐한다. 덕분에 획일적인 공직사회에서 신 부회장은 이른바 ‘튀는’ 공무원으로 통했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올백 머리와 콤비 정장(재킷과 바지 색깔이 다른 정장)은 그가 공직에 있을 때 만들어진 스타일이다. 30년 이상 지난 지금도 공무원들이 시도하기 힘들 정도로 파격적이었다.

공직사회에서 그의 파격 행보를 대표할 수 있는 일화는 바로 ‘골프장 사건’이다. 1980년대 초반 전두환 대통령은 전국적으로 공무원들에게 ‘골프금지령’을 내렸다. 악화되는 경제상황에서 공무원들이 흥청망청하는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는 엄명이었다.

하지만 당시 사무관이었던 신 부회장은 자비로 기자들과 다섯 팀을 꾸려 골프장 회동을 가졌다. 아무리 공무원이라도 자비로 골프를 즐긴다면 국민들에게 부끄러울 게 없다는 소신 때문이었다. 그 후로도 그는 누구와의 어떤 모임에서건 자신의 비용은 직접 계산했다고 한다.

지난 1992년에는 앨범을 제작하기도 했다. 평소 팝 발라드를 즐겨 부른다는 신 부회장은 김현식, 송창식 등 당대 최고 유명 가수들의 곡을 직접 불러 앨범에 담았다. 상업용으로 만든 앨범이 아니다 보니 100여 장밖에 찍지 않았고, 앨범을 들어본 사람도 가까운 지인들에 한정됐다. 신 부회장은 지금도 지인들에게 자신을 “웬만한 가수들보다 데뷔가 빠른 원로가수”라고 소개하며 노래 솜씨를 뽐낸다.

덕분에 신 부회장은 당시 출입기자단이 뽑은 ‘가장 공무원답지 않은 공무원’ ‘가장 놀기 좋아하는 공무원’으로 꼽히기도 했다. 하지만 당사자인 신 부회장은 오히려 덤덤하게 당시를 회상한다. “남들은 나보고 ‘기인’이라고 하지만, 사실 나는 가장 그 시절에 맞게 튀지 않게 생활했다고 자부합니다.”

▶공직생활의 최대 위기는 정치를 하라는 주변의 강요(?)

신 부회장은 튀는 행보만큼이나 업적도 많다. 그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바로 소비자보호법의 근간을 만든 것이다. ‘소비자의 권익’이라는 용어 자체가 생소하던 1980년대 중반, 신 부회장은 물가정책국 유통소비과에서 관련 법률을 제정하는 작업에 돌입했다.

“소비자보호법은 소비자의 기본 권리를 명시하고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소비자의 피해구제라는 개념을 도입한 법입니다. 당시 국민들로부터 많은 호응을 받아 상당히 보람을 느꼈습니다.”

신 부회장은 또 지금의 올레TV를 탄생시킨 방송통신융합법도 시장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는 차원에서 의미 있는 성과였다고 소개했다. 당시 복지부 장관의 반대로 부결되기는 했지만 국민연금개혁법도 성과 중 하나로 꼽았다.

승승장구하던 그의 공직생활에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신 부회장의 위기는 공교롭게도 선거 때마다 찾아왔다.

그는 지난 1988년 총선 이후로 선거 때마다 정치권에서 러브콜을 받았다. 아버지인 신 전 총리가 TK(대구ㆍ경북) 지방의 대부이다 보니, 아들인 신 부회장도 으레 정치를 할 것이라는 세간의 시각 때문이었다.

“TK의 대부였던 아버지와 고위 공무원이라는 저의 간판이 상당히 매력적이었던 모양입니다. 선거 때마다 내가 언제 공직을 그만둘 것인지를 놓고 내기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죠.”

실제로 선거 때만 되면 신 부회장이 그만둔다는 소문이 마치 사실인 듯 돌아다녔다. 주변의 관심과 눈초리가 부담스러울 정도였다고 한다.

사실 신 부회장 입장에서는 마음만 먹으면 정치를 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부친이 3선을 했던 지역구가 있었기 때문에 그 지역구를 물려받으면 국회의원쯤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신 부회장은 정치판에 나서는 것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이다.

“영감의 공직생활에는 상당한 부침이 있었는데, 그 배경에는 정치권의 음모와 술수, 계략, 전략적 판단이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그런 정치판을 보면서 정치는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혹자는 STX 부회장 직에서 물러나면 정치에 나가는 것이 아니냐는 시각이 있는데 절대 정치를 할 생각이 없습니다.”

▶강덕수 STX 회장과의 인연, 관에서 민으로

신 부회장이 지난해 STX라는 기업으로 복귀했을 때 주변에서는 의외라는 반응이 많았다. 보통 전직 경제관료들은 억대 연봉을 받고 로펌의 고문직으로 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박봉으로 고생했던 공직 경력을 보상받으려는 심리가 큰 탓이리라. 하지만 신 부회장은 과감히 로펌의 러브콜을 포기했다.

“퇴직 후 일자리를 주겠다고 먼저 연락이 온 것은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2곳의 로펌이었습니다. 모두 고액 연봉의 고문직이었지만, 공직에 있는 후배들에게 부탁하며 사는 로비스트 역할이라 제 적성에 맞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퇴직 후 아버지의 이름을 딴 우호문화재단에서 고문직을 맡아 생활하던 어느 날, 신 부회장에게 강덕수 STX 회장이 찾아온다. 강 회장과는 동향 출신으로, 집안끼리 잘 아는 사이라 가끔 만나 식사를 하는 친분을 갖고 있었다. 늘 유쾌하던 강 회장이 그날 유독 진지하게 말을 꺼냈다.

“강 회장이 좀 있으면 STX가 설립 10주년이 되는데, 앞으로 새로운 10년을 구상하는 큰 밑그림을 만들 사람이 필요하다고 진지하게 말하더라고요. 민간에서는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없으니 그 역할을 꼭 제가 해야 한다고요. 로펌 고문처럼 뒷방 늙은이로 있는 것보다 제 주전공(기획ㆍ예산업무)을 살릴 수 있는 이 일이 매력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이에 신 부회장은 강 회장의 제안을 받아들여 공직자윤리법상 취업이 제한된 2년의 기한이 지나자마자 2010년 1월 STX그룹 미래전략위원회 위원장으로 합류하게 된다.

신 부회장이 STX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로 10년 후 STX의 비전을 담은 ‘비전 2020’을 만드는 것이었다. 기획이나 예산 업무에 자신 있는 신 부회장이었지만, STX의 주력사업인 조선ㆍ중공업 부문에 대해서는 문외한(門外漢)이었다. 이에 조선과 중공업 부문에 대해 기초적인 것부터 공부를 해야 했다.

“산업의 특성상 STX는 기술자들이 참 많습니다. 문과 출신인 제가 기술자들이랑 얘기를 하려고 하다 보니 어려움이 상당했죠. 저와 얘기했던 기술자들은 내 앞에서는 고개를 끄덕였겠지만 뒤돌아 서서 ‘네가 뭘 알아’라며 무시한 사람도 많았을 겁니다.”

이 같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신 부회장은 ‘비전 2020’을 완성했고, 지난 4월 중국 다롄(大連)에서 STX 임직원들 및 내외신 언론 앞에서 이를 발표했다.

▶STX 미래연구원에서 그룹의 미래를 이야기하다 신 부회장은 ‘비전 2020’을 완성한 후 STX 미래연구원에서 대표이사를 맡게 됐다. 직함도 비상근에서 상근 부회장으로 바뀌었다. 미래연구원이 그룹의 10년 후 사업전략을 짜는 싱크탱크인 만큼 그가 하는 일에 세간의 관심이 높아졌다.

그는 STX가 지금과 같은 성장세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국제 지역분업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조선은 지난 1970년대 한국에 들어온 후 한국경제를 지탱해온 주요 산업입니다. 하지만 컨테이너·벌크선 등 중저가 선박은 이미 중국 조선소들이 턱밑까지 쫓아왔습니다. 이런 시장 상황에서 STX가 살길은 LNG와 같은 고부가가치 선박을 만드는 것입니다.”

신 부회장은 이를 위해 STX가 중국 다롄에 중저가 선박 건조를 위한 조선소를 건설했고, 한국 진해조선소에는 LNG선박을, STX유럽은 초고부가가치 크루즈선을 건조하는 등 교통정리를 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STX는 미래 먹을거리에 대한 선행 투자가 필요하다는 말도 했다. 이는 최근 그룹이 하이닉스 인수전에 뛰어든 맥락과 같다.

▶“어느 분야에 있든 떳떳하게 사는 것이 최고” 신 부회장이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바로 ‘떳떳함’이다. 구설수 없이 30년 이상 지속해온 공직생활을 깔끔하게 마무리할 수 있었고, 민간 기업에 와서 당당하게 일할 수 있는 것도 바로 떳떳하게 살아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영감이 서대문 형무소에 가기 전 마지막으로 나를 앉혀놓고 당부했던 말이 바로 “떳떳하게 살아라”였습니다. 남의 눈치를 볼 것 없이 떳떳하게 산다면 가장 나답고 보람차게 살 수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신 부회장은 공직 선배로서 최근 비리에 연루된 공무원 후배들을 볼 때 매우 안타깝다. 정책 입안을 하다 보면 산업이나 업계 쪽과 접촉할 일이 많고, 당연히 접대나 향응을 받을 기회도 많아진다. 만약 이런 분위기를 당연히 생각하면서 접대나 향응을 받기 시작하면 그 결과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된다

“국민들은 공직사회에 더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데, 사실 현직에 있을 때는 이런 사실을 모릅니다. 저도 민간 기업에 나와 보니까 이제야 알겠더라고요. 하지만 사회 통념보다 항상 한발 앞서 민감하게 생각한다면 이런 구설수는 충분히 피할 수 있습니다.”

신소연 기자/carrier@heraldm.com

신철식 부회장이 본 아버지 신현확 前국무총리는… 신철식 STX 부회장에게 부친인 고(故) 신현확 전 총리의 의미는 남다르다. 신 부회장에게 아버지는 ‘반역의 대상’인 동시에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다. 상당히 모순적이다.

신 전 총리는 당신이 워낙 대단하고 큰 인물이었던 탓에 아들의 성과는 잘 인정하지 않았다. 공부든 주먹이든 모두 1등을 해야 직성이 풀렸던 신 부회장도 집에만 들어오면 아버지 때문에 겸손해질 수밖에 없었다. 학창시절 민감한 사춘기를 보내던 신 부회장 입장에서는 상당히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신 부회장은 자신의 학창시절을 ‘아버지에게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시기’라고 정의할 정도다.

하지만 신 부회장에게 아버지는 공직사회 대선배로서, 당당한 아버지로서는 남다른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 1960년 4ㆍ19 혁명 후 이승만 정권의 요인 20여명이 자기 살길을 찾아 도망갔을 때, 신 전 총리는 제발로 서대문 형무소로 걸어 들어갔다.

어린 아들에게 떳떳하고 당당한 아버지로 보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신 부회장은 형무소로 향하던 그때 아버지의 뒷모습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신 전 총리가 형무소로 들어가기 전 아들을 앞에 앉혀놓고 유언처럼 말했던 ‘떳떳하게 살아라’는 말은 어린 아들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아 환갑을 눈앞에 둔 지금도 금과옥조(金科玉條)가 되고 있다.

신 부회장이 지금처럼 인문학이나 음악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아버지의 영향이 크다. 신 부회장은 “어렸을 때 영감과 나는 경제학 책보다 문학이나 역사 등 인문학 책을 많이 읽었다”며 “책으로 둘러싸인 서재에서 영감과 둘이 있을 때면 별다른 말이 필요 없었다”고 말했다.

이렇게 인문학을 좋아하다 보니 자연히 문인들과도 어울리게 됐다. 그때 만난 사람이 바로 지금의 배우자인 수필가 주연아(57) 씨다. 주 씨는 이일향 시조시인의 딸로 3대째 내려오는 문인 집안 출신이다.

신 부회장은 군대 복무 시 집안의 권유로 주 씨와 선을 봤다가 한눈에 반해 제대 후 바로 결혼에 골인했다. 딸인 신혜린(33) 씨도 집안의 영향을 받아 작품 활동을 했으며, 지금은 스탠퍼드 대학에서 영문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신소연 기자@shinsoso> carrier@herald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