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교포 출신 국립발레단 첫 무용수…애 둘 낳고 프리마돈나 컴백…37세에 국립발레단 단장
평생을 발레와 함께해온 여인. 재일교포 출신 국립발레단 첫 수석무용수. 아이 둘을 낳고 몸무게 80kg이 되서도 프리 마돈나로 컴백한 국내 최초의 발레리나. 37세의 나이에 국립발레단 단장직을 맡은 파격을 쓴 인물. 흡사 스페인계 여성을 떠올리게하는 강렬한 외모와 카리스마…….
그를 수식하는 표현은 끝이 없다. 항상 발레계 화제의 중심이었고, 지금도 그의 이름을 빼곤 한국 발레를 말할 수 없다.
“있잖아. 난 말야. 기적같은 여자야. 내가 생각해도 참 기적같아.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
이분. 참 재미있다. 발레리나의 고고한 이미지와 너무 멀다. 1분이면 홀딱 깬다. 목소리톤도 높고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는 그는 개그우먼의 피가 흐르는 것 같다. 처음 만나면 말 적응이 쉽지 않다. 특유의 (재일교포) 억양은 사람을 롤러코스터 태우듯 오르락내리락한다. 화려한 외모. 그와 달리 소탈한 동네 아줌마같은 성격. 국립발레단 단장이 이렇게 소탈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털털하다. 덕분에 인맥은 광대하다. 인터뷰 중간중간 지나가는 사람들과 손인사하고 소리높여 “반가워!”를 외치느라 바쁘다. 말이 빠른 만큼 정신이 분주하다. 늘 바쁘게 머릿속이 돌아가는 최태지(52) 국립발레단 단장. 그를 만나면 세상만사 즐거워진다. 우리가 잊고 살던 열정이 스멀스멀 올라와 뜨거워진다. 언어에도 온도가 있다면, 그의 언어는 펄펄끓도록 뜨겁다. 마음속 깊이서 끌어올리는 감각적이며 감성적인 언어들. 최 단장이 가장 뜨거운 순간은 바로 발레를 말할 때다.
1983년 5월, 달랑 트렁크 하나 끌고 겁없이 국립극장으로
그렇게 영화처럼 한국땅 밟아 30년을 뿌리내렸다.
일본인도 한국인도 아닌
정체성 혼란에 집시처럼 떠돌았지만 날 한국인으로 만들어 준 건
언어가 아닌 몸으로 전하는 발레
결혼 후 일부러 80kg까지 살도 찌우고,
겁나서 아무리 도망다녀도 발레는 벗어날 수 없는 내 ‘운명의 굴레’
발레가 내 길임을 깨달은 건 48세.
다시 돌아와서는 도망갈 구멍이 없었다.
내 손 들어서 왔는데, 어떻게 대충할 수 있나.
▶재일교포, 국립발레단 프리마돈나로=1983년 5월. 당시 23세. 한국땅을 밟은 첫날 영상은 또렷하다. 5월 특유의 쾌청한 날씨가 마음을 간질이던 날. 달랑 트렁크 하나 끌고 (당시 국립발레단이 있던) 남산자락의 국립극장을 찾았다. 초행길의 두려움을 날려버릴 정도의 서늘한 바람이 그를 맞았다. 자유롭다거나 포근하다거나 하는 느낌이 떠올랐다. ‘아.. 이곳이 한국이구나. 부모님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고국이구나.’ 머릿속에 남은 한국에서의 첫 장면이다.
그렇게 영화처럼 한국땅을 밟았다. 트렁크 하나 들고 가볍게 와서는, 30년을 뿌리내렸다. 이곳은 일본이 아닌 한국. 부모님이 평생을 그리워하며 노래불렀던 고국이었다. 최태지는 이후 1983년 국립발레단 ‘시에라자데’ 전막 주역, 1984년 ‘백조의 호수’ 등 줄줄이 프리마를 차지했다.
당시 말도 안 통하던 그와 유일한 소통구는 1대 국립발레단장인 故임성남 선생. 최 단장에겐 평생의 은인이자 그가 지금껏 발레를 하고 있는 계기를 마련한 분이다. 선생은 가족들 다 일본에 두고, 홀홀단신 한국행을 택한 발레리나에게 고국 대신 무한한 애정을 심어줬다.
▶경계인의 방황…집시 같은 삶=‘한국’에서 발레를 하는 것은 한국인으로서 뿌리를 찾는 과정이었다. 재일교포 출신인 그는 일본을 떠나 한국에 오기까지 경계인의 방황을 안고 살았다. 한국에 와서도 마음 편할리 없었다. 국립발레단의 프리마돈나까지 됐으니. 주위의 따가운 시선을 감수해야했다. 한국인으로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고, 완벽한 일본인도 아니었다. 한동안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문화적인 충격(컬처 쇼크)을 받으면서 마냥 휘둘렸다. 이쪽 저쪽 한 곳을 정하지 못할 운명이었기에 집시처럼 떠돌았다. ‘에이, 일본으로 갈까?’ 하는 생각이 들때마다 ‘난 한국인이 되고싶다’ ‘정체성을 가지고 싶다’는 갈망이 더 강해지는 것은 아이러니했다.
그런 그가 한국인의 정체성을 갖게된 매개는 발레였다. 많고 많은 예술 중에, 언어가 아닌 몸으로 전하는 예술인 발레와 함께한 것은 그의 운명이었다. “항상 집시처럼 떠돌아다녔지만, 고마운 것은 발레라고 하는 언어없는 예술을 배웠던 거죠. 말 못해도 배울수있고 느낄 수 있고, 한국말을 제대로 못해도 발레하기는 좋았어요. 저한테 성공했다고들 하는데, 저는 성공이 자기나라의 정체성을 지닌 것으로 생각했어요. 그만큼 갈망이 컸죠. 제가 발레를 안 했다면, 이 아이덴티티를 느낄 수 있었을까 생각하면, 정말 운명적인 선택이죠.”
▶발레, 벗어나려 해도 결국 돌아온…=발레라는 두 글자를 떠올리면 만감이 교차한다. 고교 시절 한 선생님은 스치듯 이렇게 말했다. ‘최태지, 넌 절대 발레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야’. 그말을 듣고는 ‘무슨소리? 난 어른이 되서 결혼하면 발레 절대 안할거야. 도망갈거야’라며 콧방귀 뀌었다.이제와 돌아보면 그 선생님의 말은 소름 끼칠 정도다. 어떤 운명적인 힘이 이끌었을까. 어려서부터 벗어나려했던 발레에서 결국 못 벗어났고, 결혼 후 아이 둘을 낳고도 프리마를 했다. 어디론가 도망가 있으면 누군가 손을 내밀었다. 아이 둘을 낳고 평범한 주부로 살고 있을 때 은사 임성남 선생이 찾아왔다. “발레하자. 무대에 서자” 겁나서 도망갔고, 싫다고 부인해봤다. 그러다 사람이 그리워서, 나를 찾아주는 고국에 감사해서 결국 발레로 돌아왔다.
최태지의 두번째 복귀. 국내 발레계에 유일무이한 사건이었다. 20대도 아닌 30대 중반, 아이 둘을 낳은 아줌마 발레리나라니. 당시 보수적인 분위기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일부러 살쪘어요. 아이 둘 낳고 80kg까지 나갔고 보통사람처럼 살고 싶었죠. 남편이랑 맛있는 것도 마음껏 먹고 여유있게 차도 마시고. 발레로부터 도망가려했어요. 발레가 주는 정신적인 고통에서 벗어나자 했어요. 근데 돌이켜보면 떠나있어도 항상 발레를 생각했어요. 말로는 가정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마음 속으로는 발레의 이상을 쫓았죠. 이제 생각해보면, 운명같아요. 벗어나려해도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굴레같은...”
▶국립발레단 단장, 인생의 터닝포인트=최 단장이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맞은 건 1996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15년전, 불과 36세의 젊은 발레리나가 발레단 단장이 됐다. 재일교포 출신으로 국가기관장의 자리에 오른 것도 파격이었다.
“제가 원래 밤새워서 고민해본적 없어요. 언제든 잘먹고 잘자는 성격인데. 그땐 난생처음 한잠도 못잤어요. 다음날 기자회견이라는데. 생각이나 했겠어요? 끔찍했죠. 다음날 퉁퉁부은 얼굴로 기자회견에 갔는데, 그때 장면이 생생해요. 다 아버지 또래였어요. 마치 딸 다루듯. “여기와 앉아라~”했던 기억이 나요.”
그 때부터 프리마돈나의 인생은 롤러코스터를 탔다. 순진했던 과거 여린 얼굴. 그 시간들을 벗어나. 보다 주체적으로 인생을 이끌어가야할 결정적인 시기가 찾아왔다. 항상 원하지 않아도 어떤 길로 몰꼬가 틔었는데. 이번에는 기관장의 길을 걷게됐다. 발레복과 토슈즈를 안 신기로 작정했다.
자리가 사람을 변화시킨다더니 급격히 말이 늘었다. 발레리나니까 말 한마디 안했던, 수줍었던 과거와 이별했다. 그는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고 표현한다. 과거 모습을 전혀 모르는 이들은 순진했던 마냥 수줍어하던 그의 얼굴을 알리 없다.
▶돈키호테형 리더=최 단장을 만나본 이들은 안다. 이분 정말 타고난 사업가구나. 뭔가 생각나면 추진하는 속도나 박력이 거의 돈키호테급이다. 여성스럽고 우아한 자태를 지녔으면서도 일처리하는건 장군감이다. 국립발레단장이 된 뒤 국내 최초로 해설이 있는 발레를 시작했고, 찾아가는 발레, 전막 해설 발레를 기획했다. 러시아 안무가 유리 그리가로비치의 5대 작품을 국립발레단 정기 레퍼토리로 끌어왔다. 당시 콧대높기로 유명한 유리 그리가로비치의 허락을 얻은 건, 최 단장 특유의 사람 잘 챙기는 성격 덕이다. 털털한 왕언니처럼 상대를 기분좋게 만드는 재주가 기관장으로선 큰 힘을 발휘했다.
물론 시련도 있었다. 국립발레단 단장 임기를 마치고 2004년 정동극장장에 임명됐을 때 비판이 쏟아졌다. 어떤 사업을 하든 발레를 띄우기 위한 것으로 비쳐, 여론의 뭇매도 많이 맞았다. “임명장을 받고, 일본에 계신 엄마와 통화했던게 생생해요. ‘엄마 감사해요. 발레라는 언어 없는 예술 덕에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을 찾을 수 있었는데. 이제 전통 무용을 올리는 한국의 전통극장에 갔어요. 이제 진짜 한국 사람으로 살 수 있을 것 같아요’하면서 기뻐했어요. 그게 엄마와 마지막 통화였죠.”
시련은 한번에 몰아서 온다고. 평생의 든든한 지원군인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발레가 내 갈길이구나 깨달은 게 48세. 내가 손을 들어 내길을 가야한다는 판단으로 2007년 국립발레단장직에 공모했고 지금의 자리에 도달했다. 2008년에 이어 2011년 연임까지. 정권이 바뀌면서도 자리를 유지한 유일한 기관장이다. 자리 보전을 위한 욕심으로는 해낼 수 없는 일. 그는 이렇게 말한다. “다시 돌아와서는 도망갈 구멍이 없었죠. 내 손들어서 왔는데. 어떻게 대충하겟어요.(웃음)”
▶섬뜩한 호랑이 선생=“이젠 되도록 연습실에 안 가려해요. 가면 난리를 치고 오니까. 이따위로 해? 틀린거 안보여? 눈물 쏙 빼게 혼내요. 내가 혼내면 괜찮은데, 남이 혼내면 싫어요. 내새끼 키울때랑 똑같아. 안에선 엄하게 하지만 밖에 나가면 내 새끼죠. 24명의 코드르발레도 밖에서 혼나는건 싫어요.”
그는 발레리나, 발레리노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인간성임을 의심치 않는다. “예술 때문에 사람이 사는게 아니고, 사람이 살기 때문에 예술이 존재한다”며 “사람 사는 걸 아는 사람이 예술가여야 한다”고 믿는다. 사람의 마음을 잘 아는 이들만이 좋은 무용수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테크닉은 10분보면 재미없어요. 아무리 돈을 많이 발라도 예술은 결국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에요. 사랑이죠. 예술가는 내면의 에너지를 내놓는 이들이니, 인간같았으면 좋겠어요. 바비 인형처럼 예쁜게 발레리나 아니죠. 자기가 아프고 행복하고 사랑을 해봐야 사람들에게 사랑을 주는건데 스킬만 익히면 뭐하겠어요.”
▶양곱창과 찜질방 사이=아직 해야할 일이 너무 많다는 그는 이제 ‘아버지와 자녀가 함께 찾는 발레’를 기획중이라고 했다. 영화인들과 발레 작업도 올리고 싶다 했다. 내년에는 가야금 명인 황병기 선생과 국악을 접목한 발레도 선보일 예정이다.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얘기들. 아줌마 수다라고 하나. 최단장과 대화는 시간가는 줄 몰랐다. 재미있는 인생사만큼 유머러스한 입담을 자랑하는 그는 여전히 혈기왕성하다.
“나는 알면 알수록 재미있는 여자야. 쉴때는? 자신과 얘기해요. 혼자 찜질방 가서 진지하게 대화해요.”
몇시간 동안 진지하고 열정적인 언어로 사람을 현혹시키다가도 그의 마지막 말은 결국 코미디였다.
“자기야~양곱창 먹으러 가자. 요앞에 곱창 끝내주는데 있어. 내가 쏠게. 달려달려.”
조민선 기자/bonjod@heraldm.com, 사진=박해묵 기자/mook@heraldm.com
최태지에게 가족이란
항상 가정이 최고라 말했지만
발레때문에 상처받은 아이들
늘 마음 한구석이 아리죠…
가족은 속살같다. 잘 드러나지 않아 부드럽고도 연약한 속살.
평생을 예술가로 살아온 최태지 단장에게 가족은 온갖 복잡한 감정이 교차되는 존재다. 가족 만큼 그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게 있을까. 깔깔깔 웃다가도 가족 이야기가 나오면, 말을 아끼는 모습을 보인다.
예술가로서 이토록 찬란한 길을 걸어왔기에, 그의 가정은 보통 사람의 평범한 그것과는 많이 달랐다.
사랑에 잘 빠지는 여인. 아름답고 열정적인 가슴을 지닌 예술가. 그의 예술적 재능과 결혼 생활은 애초에 어울릴 수 없는 조합이었는지도 모른다.
두 딸을 향한 애정은 남달랐다. 뭇 어머니들처럼 아이들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주지 못했다는 것은 항상 마음의 짐이다.
“집에서 둘째 아이를 바랐을 때, 눈물을 흘리며 발레단에 사표를 던졌어요. 산부인과에 가서 아이를 갖겠다고 말하면서도 울었죠. 곧바로 둘째를 가졌고, 그렇게 발레로부터 도망갔어요. 발레리나가 아이를 둘씩이나 낳고, 발레를 할 수 없을 때였으니까. 발레냐. 아이냐. 둘 중에 하나를 택한 셈이죠.”
하지만 그는 운명적인 이끌림으로, 아이 둘을 낳고도 발레를 놓지 못했다. 평생 도망가려했던 발레로부터, 결정적인 순간에는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마지막까지 발레를 포기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이 받은 상처는 필연적이었다. 발레에 푹 빠져있는 엄마. 또래 친구들이 받는 관심의 절반도 못받는 아이들은, 엄마를 넘어 발레까지 미워했다. 두 딸은 “나는 이 다음에 결혼하면 아이 옆에 있어줄 거야”라고 말할 정도로 애정을 갈구했다. 엄마는 아직도 그 대목이 가슴이 아프고 미안하다.
“항상 가정이 최고라고 말하면서도 마음 속에는 항상 발레가 있었다는거. 아이들은 다 알았겠죠. 제가 사랑하는 발레로 인해 가장 가까운 가족들이 피눈물 흘리게 했다는 게 마음 아파요. 전 이기적인 여자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어쩔 수 없는 예술가의 이기성이 있었던거죠.”
그럼에도 첫딸 최리나는 엄마의 길을 물려받았다. 리나는 얼마전까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프리마로 활동한 실력파 무용수다. 예술적 재능이 남달랐던 둘째 딸 세나는 발레를 접고, 현재 뉴욕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있다. 첫 남편과 이혼후 혼자 살던 최 단장은 2004년 재혼해 현재 남편과 또다른 삶을 꾸려나가는 중이다.
최태지가 걸어온 길
▶출생=1959년 9월 23일(일본 교토 태생) ▶1968~1980년 日가이타니 발레아카데미 입문 및 무용수 ▶1987~1992년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1993~1995년 국립발레단 지도위원, 국립발레단 부설 문화학교 주임 지도강사(국립발레아카데미 시초) ▶1996~2001년 12월 국립발레단 단장 겸 예술 감독 ▶2000~2001년 국립발레단 부설 발레아카데미 교장 ▶2001년 9월~2008년 2월 성균관대 무용학과 겸임교수 ▶2004년 6월~2007년 12월 정동극장 극장장 ▶2008년~현재 국립발레단 부설 발레아카데미 교장 ▶2008년~2010년 국립발레단 단장 겸 예술감독 ▶2011년~현재 국립발레단 단장 겸 예술감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