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8회> 죽음의 계곡 30
이를테면 김지선은 재벌 후계자 유호성과 함께 일본에 신혼살림을 차린 후에 낮에는 마세라티를 몰고 다니며 여행을 즐기고, 밤에는 폴트로나 프라우 가죽침대 위에서 뜨거운 사랑을 나누면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하긴 유호성을 구워삶아서 평생의 반려자로 삼는 것쯤이야 별반 어려운 일도 아니라고 여겼다. 왜냐고? 37인치의 바스트와 허리까지 출렁이는 갈색 머릿결, 그리고 뇌쇄적인 미모 때문이기도 했지만 더욱 자신만만했던 것은 유호성이 레이싱의 재미에 푹 빠져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버님께서 레이싱 팀을 만들어주시는 순간부터 우린 영원한 한팀이야. 언젠가 맞을 우승의 순간을 위해서 마음도 몸도 하나가 되어야만 해.”
포르셰 968 카브리올레를 타고 유민 제련그룹 본사 건물 앞 광장을 누비던 날, 유호성은 그녀의 허리를 꼭 끌어안은 채 귓가에 대고 이렇게 속삭이지 않았던가. 그리고는 곧바로 몸부터 합치고야 말았지.
하긴 유호성의 생각도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어차피 사업에는 관심도 없고 자질도 없었으니 애초에 자동차 경주에 빠져들었던 것인데, 느닷없이 골프 선수가 되라는 성화에 골머리를 썩이곤 했을 뿐이었다. 누가 세월이 약이라고 했던가? 어영부영 세월만 축내던 차에 저절로 레이싱에 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으니 행운이 제 발로 찾아온 셈이었다.
“지선 씨. 우리 일본에 아주 눌러살자. 내가 먼저 일본에 자리를 잡으면 부모님 몰래 지선 씨도 일본으로 와.”
“그럴 수만 있다면 나야 좋지요. 문제는 호성 씨야. 부모님이 나와의 교제를 반대하는데 호성 씨가 거역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내 인생은 나의 것! 그런 노래가사도 몰라?”
“재벌들은 생각이 달라요. 호성 씨 아버님도 마찬가지일 거야. 자신이 이룬 부를 영원히 후대에 물려주려고 하지요. 하지만 아무리 자식이라도 당신의 뜻을 거역하면 잘리게 될 거야. 호적에서 파버린다고요.”
“잘리면 그만이지. 우리끼리 좋아 죽겠다는데 어떻게 말리겠어?”
“잘리면 당장 뭐 먹고살아요? 호성 씨가 먹고 노는 일 외에 할 줄 아는 일이 있나요?”
“허 참, 듣고 보니 걱정이 되긴 하네. 그럼 우린 어쩌지? 헤어져야 하나?”
“거 봐요. 금세 휘둘리잖아? 돈푼이나 있는 집안의 아들들은 이렇게 줏대가 없어. 남자가 한 번 여자를 품었으면 끝장을 볼 줄 알아야지.”
“끝장을 보라고? 어떻게?”
“미리 혼수를 장만하면 되잖아요. 나를 임신시키라고요.”
김지선은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순간 유호성의 귀가 번쩍 뜨였다. 이왕 레이싱에 발을 들여놓았으니 오래전부터의 꿈을 거의 이룬 셈이었다. 다만 일급 선수로 성장할 일이 아득할 뿐인데 김지선과 같은 여자와 한팀을 이룬다면 그마저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 우리 아기부터 만들자. 지금 당장 시작하는 거야.”
아직 일본으로 출발하기도 전에 유호성과 김지선은 이렇게 생쇼를 하고 있었다. 참으로 단순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런 정신 상태로 일본에서 레이싱 수업을 받겠다고?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었다. 카트에서 포뮬러 포드, F3로 이어지는 일본의 레이스 피라미드는 불굴의 정신으로 덤비지 않는 한 살아남기 어려운 구조로 짜여 있지 않은가.
수백만 명에 달하는 카트레이서가 이 세상에 20여명뿐인 F1 드라이버가 되기까지의 과정은 그야말로 혈전과 다름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뭐가 어째? 아기부터 만들자고?
그런 상황쯤이야 참아줄 만도 했다. 까짓, 어설픈 불장난 정도로 봐주면 그만일 테니까. 하지만 정작 심각한 문제는 다른 곳에서부터 생겨나고 있었다. 현성애! 유민 회장으로부터 허락을 받은 그녀가 드디어 칼을 갈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