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죽음의 계곡 (27)
글 채희문/그림 유현숙
울며 겨자 먹기로 시작하게 된 레이싱 사업을 위하여 거금을 출연하고 난 뒤로부터 유민 회장은 코가 석자나 빠져있었다. 기자들을 잔뜩 불러 모아놓고 홍보영화를 상영하며, ‘자동차 경주야말로 섹스보다도 짜릿하다’고 열변을 토하던 때와는 극히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아이고… 배야.’
온 몸에 힘이 쭉 빠지는 것으로 보아 무기력증이 찾아온 모양인데 웬걸, 자산현황표만 들여다보면 배가 아프니 울화통까지 겹친 것 같았다. 무려 500억 원이란 거금이 하루아침에 빠져나가고부터 생겨난 병리현상이라고나 할까?
근래 며칠 동안은 회사로 출근하기만 하면 자산부채현황을 들여다보는 것이 첫 번째 일과였다. 현금, 보통예금, 외상매출금 순으로 나열되어 있는 현황표를 확인하면서부터 무력증이 시작되고, 하루가 다르게 불어나는 외상매입금과 미지급금을 볼 때마다 살살 배가 아파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나마 500억 원은 어거지로 짜 맞출 수 있었지만… 나머지 2500억 원을 1년 안에 무슨 재주로 끌어 모은단 말이오? 만약에 그 돈으로 자장면을 사면 도대체 몇 명이나 먹을 수 있을지 계산해보라고.”
“10억 짜리 아파트는 250채를 살 수 있네요. 하지만 3000원 짜리 자장면을 사먹으려면… 아이고, 계산기가 필요해요.” 유민 회장은 공연히 현성애 차장에게 화풀이를 했다. 능히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 말기 암 환자가 그를 보살피는 호스피스에게 안온함을 느끼듯, 자금 조달의 막장에서 헤매는 유민 회장은 현성애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것으로서 그나마 위안을 얻곤 했으므로.
“어머나! 8000만 그릇이 넘어요. 덤으로 나오는 군만두까지 합치면 우리나라 전 국민이 하루 종일 먹을 수 있는 양이네요.”
“미치겠군. 전 국민에게 하루 종일 자장면을 배달시켜주고도 남는 돈이란 말이지?”
“네 회장님. 큰돈을 투자하는 일이긴 하지만… 스폰서십을 통해서 이익을 남기는 운영을 추구해야 합니다. 서양에서 소규모 독립 팀으로 F1을 운영하는 경우가 그렇거든요? F1 팀을 꾸려가는 데에도 1년에 2000 억 원씩 들어가지요.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동차 회사나 거대기업에게 지분을 내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요. 윌리엄스, 포스 인디아, 수퍼 아구리 같은 팀들이 그런 방식으로 살아가요.”
“그러니까 자네는… 다른 대기업에게 ‘런런런 SPC’의 지분을 절대 내주지 말고 오로지 협찬을 받아서 운영하란 말이지?”
“그럼요. 나중에 파이를 혼자 차지하시려면 절대 지분을 내줘선 안 됩니다. 그런 의미로 이번에 거성자동차의 10% 지분 참여가 결렬된 것은 오히려 잘 된 일이에요. 그 작자들, 처음엔 협찬한다고 하더니 결국엔 지분을 요구했잖아요?”
“그래? 하지만 2500 억 원이 애들 장난인가? 그 많은 돈을 협찬 받으려면 사방에 머리 깨나 조아려야 하겠군. 천하의 유민이가 말이야.”
“한번 조아리실 때마다 돈 다발이 100억씩 들어온다고 생각해보세요. 까짓 거…”
현성애는 이렇게 유민 회장을 다독였지만 속으로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유민 회장에게 독이 든 술잔을 권했으니 이제 그가 받아 마시기만 하면 뜻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뜻이란? 뻔할 뻔자. 유민을 알거지로 만드는 일 아니겠는가.
‘F1과는 차원이 다르단 말이야, 이 머저리 같은 영감아. 이번 5개국 관통 랠리는 흥행을 보장할 수 없는 단발성 경기인데 누가 협찬을 하겠니? 너 혼자 떠벌여놓고 돈을 못 구해서 부도라도 내면 너는 생매장 되는 거야, 이 얼간아.’
그녀는 속으로 이렇게 비아냥대면서도 겉으로는 유민 회장의 두 손을 꼭 움켜쥐고 있었다. 겉으로만 본다면 ‘힘내세요, 회장님!’ 하며 진심으로 응원하는 모습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유민 회장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역시 자네와 대화를 나누면 힘이 솟는군. 어려운 고비를 혼자 이겨내야 나중에 파이를 혼자 먹을 수 있지. 아무렴!”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