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곳곳에서 사시 흔적 사라지는 고시촌, 4000명 듣던 대형강의 이제 100명 남짓 수강 - 고시생 떠난 자리 공시족이 메워…학생들 “로스쿨은 비싸서 사법시험 대체 어려워” - 싼 밥값 찾는 이들에겐 새로운 보금자리, 아메리카노 한잔 1500원ㆍ고시식당 3900원
[헤럴드경제=양대근ㆍ김진원 기자] “사법시험은 이제 아무도 신경 안 쓰는데, 왜 자꾸 사시 질문을 하시나요.”
23년 동안 서울 신림동 고시촌에서 작은 복사집을 운영해 온 김모(53)씨가 기자에게 되물었다. 3, 4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의 가게 안은 사법시험 교재들로 가득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진열장 앞쪽 대부분이 행정고시 관련 강의노트로 채워져 있었다. 사시는 뒤쪽 구석으로 밀려났다. “그나마 토요일(27일)에 1차 시험이 있어서 조금씩 나가고 있지만 이번주가 지나면 더이상 아무도 안 찾겠죠.” 김씨는 덤덤하게 말했다.
지난 23일 점심 무렵 찾은 신림동 주변은 쌀쌀한 바람만큼이나 을씨년스러웠다. 큰 시험이 임박했다는 분위기는 특별히 느껴지지 않았다. 과거 같았으면 마지막 정리를 하는 고시생들로 어딜가든 북적였을 터였다.
신림동 일대는 2000년대 중ㆍ후반까지 ‘고시촌의 메카’로 불리며 최전성기를 누렸다. 지난 1980년대부터 인생역전의 꿈을 품은 고시생들이 전국에서 하나둘씩 모여들어 형성된 게 지금의 고시촌으로 발전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사시생은 전체 고시생의 50~60%에 육박할 정도로 고시촌에서 영향력이 높았다. 하지만 2008년 로스쿨이 도입되고 2017년으로 예정된 사법시험 폐지일이 가까워지면서 급격한 변화가 시작됐다.
신림동 공인중개사 업계에 따르면 지난 3~4년 동안 1만명에 가까운 고시생이 줄어든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방값도 곤두박칠쳤다. 원룸의 경우 가장 시세가 비쌌던 2008년부터 2010년 당시 보증금 500만원 월세 45만~50만원에 계약됐지만, 현재는 평균 보증금 100만원 월세 30만원 정도에 방이 나가고 있다. 노량진의 비슷한 방과 비교하면 20만~30만원 싼 편이라고 한다.
이 곳에서만 30년 가까이 부동산중개업소를 하고 있는 윤무갑(67)씨는 “작년 봄부터는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인원들이 1000여명 들어와서 한창 안 좋을 때보다는 사정이 좀 나아졌지만 여전히 어렵다”며 “그래도 싼 가격 때문에 서울대생, 직장인, 외국인 유학생, 공무원ㆍ자격증 시험 준비생들이 선호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고시촌 곳곳은 사시의 흔적이 확연하게 사라진 것을 알 수 있었다. 유명한 한 중고책 서점에서 7년동안 총무로 일하고 있는 김모(30)씨는 “고시책을 찾는 사람이 거의 없어 사실 요즘 책을 사들이는 게 조심스럽다”며 “사시를 포기한 학생들은 주로 7급 공무원이나 법무 행정직 등 공무원 쪽으로 돌리고 있고, 학비가 비싼 로스쿨을 선택하는 학생은 적은 것 같다”고 설명했다.
‘ㅇ’ 고시식당을 운영 중인 김모(49ㆍ여)씨는 여전히 한끼 밥값으로 3900원을 받고 있었다. 그는 “2년전부터 장사가 매우 힘들어졌지만 학생들 주머니 사정을 알기에 선뜻 가격을 올리지 못하고 있다”고 한숨을 쉬었다.
신림동에서 가장 규모가 큰 ‘ㅎ’ 법학원의 게시판 아래 쪽에 그나마 ‘아직도 늦지 않았습니다’. ‘형법 족집게 특강’, ‘민법 핵심체크 마무리’ 등의 강의 광고지가 조그맣게 붙어 있어 1차 시험이 곧 열린다는 사실을 새삼 알 수 있었다. 반면 다른 법학원은 아예 사시 관련 강의를 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한 법학원 관계자는 “한창 때 사법시험 문제풀이 반에서 수업을 듣던 학생 수가 4000명이었는데 현재는 사시 관련 강의 등록자 수를 전부 다 합해도 100명 정도 될까 말까 한다”며 “로스쿨 도입 이후 학원 매출이 반토막 넘게 급감했고, 많은 강사진들은 자신들의 전문분야를 살려서 노량진ㆍ강남 등으로 빠져나갔다”고 토로했다.
사시존폐 논란에 대해 이 관계자는 “어차피 존치 여부는 정치권에서 결정할 문제이고 학생들은 아무런 결정권이 없다”며 “지금 남아있는 사시생들은 굉장히 오랫동안 이 시험에만 매달려 온 장수생이 대부분이다. 정책적인 부분에 대해서 생각할 겨를 없이 그냥 절박하게 공부하고 있다”고 밝혔다.
신림동 학원가에서 20년을 보낸 다른 법학원의 본부장도 “최소 6월 전에는 다음 시험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나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학원가 뿐만 아니라 사시 준비생들까지도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것”이라고 꼬집었다.
고시생들의 반응은 의외로 담담했다. 사시가 없어지면 없어지는대로, 시험에 떨어지면 떨어지는대로 다음 단계를 준비해야 할 것 같다고 입을 모았다. 2000년대 명문대 법대에 입학한 이후 5년 넘게 사법시험을 준비하는 K씨는 “그동안 점수가 잘 나와서 아예 사시를 포기하기는 아까웠다”며 “국가 정책이 생각보다 유동적이어서 거기에 미래를 걸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느꼈다. 지금은 그냥 시험 준비만 열심히 하고 있다”고 짧게 말했다.
떠난 고시생들의 빈자리는 가난한 공시족과 외국인 유학생, 직장인들이 채우고 있다. 아메리카노 커피 한잔이 1500원 정도인 싼 물가가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ㅅ’ 공인중개사를 운영하는 김모(40)씨는 “방세를 극도로 절약하려는 강남 회사원들이 방을 잡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서울대 어학당에 다니는 외국인 유학생들도 이 주변에 많고, 외국인 근로자들은 고시촌보다는 조금 더 떨어진 윗쪽 동네에 많다”고 밝혔다.
오는 27일 열리는 제58회 사법시험은 총 지원자 5763명 중 1차시험 면제자 310명을 제외한 5453명이 응시했다. 이들 모두 각자의 꿈을 걸고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인생역전의 기회에 도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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