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김진원 기자] 제58회 사법시험 1차 시험이 27일 치러진다. 총 지원자 5763명 중 1차 시험 면제자 310명을 제외한 5453명에게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현행법에 따르면 1차 시험은 끝이다. 내년의 2차 시험을 보기 위해서라도 이번 1차 시험 합격은 필수적이다. 마지막이 될지 모를 58회 사시를 앞두고 지난 반세기사(史)를 정리했다.

사법시험의 시작은 1947년 치러진 조선변호사시험이다. 1950년부터 고등고시 사법과로 불렸다. 사법과를 따로 떼어 1963년 사법시험으로 바꾼 뒤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법조인을 뽑는 사법시험이 오랜 기간 법 아닌 명령에 따랐던 것은 아이러니다. 고등고시 시절엔 ‘사법관시보의임명및수습및고시규정’에 따랐다. 1963년부터는 ‘사법시험령’에 따랐다. 2001년에서야 사법시험법이 공포 시행됐다.

시간이 흐르면서 시험 방식도 바뀌었다. 80년대에는 국사와 국민윤리가 필수과목이었다. 2004년부터는 토익과 토플 등 영어시험 성적을 반영했다. 2006년부터는 성적과 출신학교를 알 수 없도록 블라인드 면접이 도입됐다.

초기에는 선발 인원이 정해져 있지 않았다. 1969년까지 평균 60정 이상의 점수를 받아야 합격하는 ‘절대평가’ 였다. 매년 합격자 수가 들쑥날쑥하다는 비판이 나왔다. 1967년 합격자는 불과 5명이었다.

정원제는 1970년부터 도입됐다. 안정적인 법조인력 수급을 위해서다. 그후 10년 동안 합격자가 60~80명에서 유지됐다. 1980년 사법시험령이 전면 개정되면서 합격자는 300명까지 증가했다.

1995년 사법개혁안으로 ‘사법시험 선발인원 단계적 증원’이 결정됐다. 1996년 합격자 500명을 배출한 이후 해마다 100명씩 늘려 2001년부터 ‘합격자 1000명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다.

이른바 사법시험의 황금시대다. 많은 선발인원에 힘입어 비(非)법대생도 대거 사법시험에 도전했다. 신림동 고시촌은 북적였다.

그러나 이처럼 많은 고시생을 양성한 게 되레 사법시험 폐지의 단초가 됐다. 고시 낭인 등의 문제가 제기되면서다. 로스쿨이 대안으로 떠올랐다.

사실 로스쿨 도입에 대한 논의는 1990년대 김영삼 정부 시절 세계화 추진의 일환으로 시작됐다. 그러나 사시 출신 정치인과 법조계의 반발로 무산됐다. 김대중 정부 시절 역시 검토했지만 반대 여론을 이겨내지 못했다.

노무현 정부는 로스쿨 도입과 사시 폐지를 본격화했다. 고시 낭인 문제 외에 특정 대학 전공에 쏠린 사법부의 획일주의를 탈피하고자 했다. 또 외국어 능력과 다른 분야에 대한 전문 지식을 갖춘 법조인을 양성하고자 했다. 변호사 공급을 늘려 변호사 비용을 낮추고 법조인에 대한 국민의 접근성을 높이는 것도 로스쿨 도입 배경이었다.

그러나 2007년 통과된 로스쿨법은 정쟁을 거치면서 누더기가 됐다. 입학 정원에서 있어 기득권이 인정됐다. 불투명한 학생 선발 과정과 관련해 현대판 음서제라는 비판에 휩싸였다.

한편 사법시험을 통해 가장 큰 성공신화를 쓴 인물은 사법시험을 폐지한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1975년 당시 서울대 등 명문대 법대 출신이 합격자 대부분을 차지하던 시절 상고 출신인 노 전 대통령의 합격은 대한민국 사회를 깜짝 놀라게 했다.

이 외에도 대법관을 지낸 뒤 노 전 대통령과 대권을 다퉜던 이회창 전 총리, 옛 통진당 대표였던 이정희 전 의원, 고시 3관왕을 기록한 고승덕 전 서울시교육감 후보, 학생운동으로 유치장 수감 중 합격증을 받아든 문재인 의원 등에게도 사시는 세상에 이름을 알리는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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