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여우(女優)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명작, 명품 수집가로도 유명하다. 숱한 그림과 보석 등 그의 유품 중에 가장 값 나가는 것은 빈센트 반 고흐가 자살하기 1년 전에 그림 작품 ‘아쉴룸 전경과 생레미 수도원(1889년)’이다.
프랑스 생 레미는 고흐의 요양원이 있던 곳이다. 라틴어 아쉴룸(sy′ lum)은 탄압과 고통의 피난처로, 삼한시대 ‘소도(蘇塗)’ 같은 곳이다.
고흐가 이곳에서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별이 빛나는 밤에’ 같은 희망 어린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이 마을 ‘아쉴룸’의 흔적을 보면서 고통을 피해보려고 안간힘을 썼기 때문이다. 리즈 역시 3년간 심장질환을 겪을 때 고흐의 ‘아쉴룸…’을 보면서 삶의 의지를 불태웠을 것이다.
흔적만 있을 뿐, 진정한 피난처가 되지 못했을까. 고흐는 숨지면서 “고통은 영원하다”는 명언을 남긴다.
아쉴룸은 야만적 복수나 사적인 형벌이 활개를 치던 고대와 중세, 약자들이 보호받던 성역이다.
자유, 평등, 법치가 민주적 제도로서 확립되기 이전 시기, 권력을 가진 자, 힘 센 자로부터 탄압받고 고통받던 사람이 은신해 안식을 얻던 곳이다.
믿을 만한 공권력이 발휘되지 못해 억울하게 죄인으로 몰린 자가 숨어들면 면죄부를 주기도 했다. 프랑스 노틀담 사원, 영국 칼멘 수도원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아쉴룸은 시민 주권 확립기를 거치면서 18세기 무렵 그 기능이 완전히 사라지고, 유적만 남았다.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21세기, 서울 한복판 견지동에 아쉴룸이 생겼다. 힘을 가진 자가 사사롭게 약한 자를 징벌하는 시절도 아니고, 이쪽도, 저쪽도 번갈아 권력을 쥐어 본 대한민국에서 성역 같은 도피처가 있다는 게 아쉽다. 역사의 후퇴를 지켜봐야만 하는 시민의 고통이 계속되지 않았으면 한다.
함영훈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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