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이형석 기자]영화 ‘노예 12년’(감독 스티브 맥퀸)은 남북 주별로 흑인이 자유민과 노예로 운명이 갈렸던 1840~5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다. 자유민으로 살아가던 흑인 바이올린 연주자가 노예로 인신매매돼 백인이 주인인 농장을 전전하며 가혹한 노동과 학대를 받아야 했던 12년간을 그렸다. 엄혹한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한 흑인의 생존 의미와 자유를 향한 갈망을 담아냈다.
이 영화에서는 정의를 위해 싸우는 ‘영웅’은 존재하지 않는다. 곧,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다른 사람을 위해 싸우고, 부당한 상황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자신을 위한 싸움조차도 부당함에 저항하기 위한 목숨 건 투쟁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이 영화에서 거의 모든 인물의 행위는 생존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한다. 무엇인가를 바꾸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버틴다. 이 영화가 일반적인 할리우드 영웅담과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다. 이 영화의 미덕이자 한계이기도 하다.
노예제가 남아있던 남부와 흑인이 자유민으로 살아가던 북부로 미국이 나뉘어져 있던 1841년, 흑인 솔로몬 노섭(치웨텔 에지오포)은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은 신분으로 가족들과 행복하게 살아가던 바이올린 연주자였다. 공연을 다니며 비교적 부유한 생활을 향유하던 평범한 시민이었던 그는 어느날 곡마단에서 일하는 이들이라며 소개받은 백인들의 제안을 받고 워싱턴 공연을 떠난다. 기분좋은 술자리 후 만취해 잠이 들었던 그가 눈을 떠 발견한 것은 몸에 족쇄가 채워져 감금당한 자신이었다. 공연으로 꼬드긴 백인들이 인신매매범이었던 것. 그는 하루아침에 조지아에서 도망친 노예로 신분이 바뀌고, 백인이 운영하는 남부의 농장으로 팔려나가게 된다. “나는 노예가 아닌 자유인”이라고 항변하지만, 그 때마다 돌아오는 것은 살갗을 찢는 채찍질과 발길질 뿐이었다. 악독한 농장관리인의 학대를 이겨내며 비교적 관대한 농장주 윌리엄 포드(베네딕트 컴버배치 분)의 신임을 받게 되지만, 주인의 빚 때문에 다시 다른 곳으로 팔려가는 신세가 된다. 새로 그의 주인이 된 이는 남부에서도 악명이 드높은 에드윈 엡스(마이클 파스벤더 분)였다. 에드윈 엡스의 횡포가 나날이 도를 더해가는 가운데에도 노섭은 뉴욕의 가족에게 자신의 소식을 알리고, 자유민임을 증명하려고 시도하지만, 번번히 수포로 돌아가고 농장주의 흑인 노예들에 대한 변태적인 학대와 구타, 능욕, 살인 행각은 도를 더해간다.
영화는 완벽한 절망의 상황 속에서도 탈출과 진실의 희망의 끈을 놓치 않는 솔로몬 노섭의 강인한 의지와 생존의 본능에 초점을 맞춘다. 주인공은 흑인의 참혹한 현실을 온 몸으로 겪어내고, 백인들의 파렴치하고 무자비한 폭력과 이로 인한 노예들의 절망을 지켜보지만, 한 순간도 미래에 대한 꿈을 잃지 않는다. 그를 버티게 하는 힘은 신앙이나 정의에 대한 믿음 따위가 아니라 빼앗긴 행복을 언젠가는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과 그날을 맞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버텨야 한다는 절대적인 생존 의지였다.
이 영화에서 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선의의 크기는, 작게는 극중 노예상인의 대사 대로 자신이 가진 동전의 갯수를, 많아야 자신의 생존과 이해를 위협받지 않는 정도를 벗어나지 않는다. 자유민 증명서 1장이면 되찾을 운명이 무려 12년의 세월 후에야 솔로몬 노섭의 품에 다시 돌아온 이유다. 그러므로, 이 영화가 말하는 것은 인간이 가진 선의의 위대함보다는 생존을 위한 인간의 본능과 불굴의 의지가 보여주는 숭고함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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