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이형석 기자]“여배우 A양과 국회의원 B는 스폰서 관계“
짤막한 단 한 줄의 문장이 한 여자를 죽음으로 몰고 갔으며, 한 남자를 몰락시켰고, 대한민국을 들썩이게 했다. 완강하게 둘러쳐진 권력의 장막 속에서 대기업의 임원이 기민하게 움직였고, 청와대 관료가 은밀히 나섰으며, 언론이 촉수를 곤두세웠다. 한국 사회 권력의 동학을 보여주는 데는 루머 한 마디로 족했다. 어렵게 완성된 퍼즐 속 그림이 뜻밖이라 할 수는 없지만, 조각을 짜맞추는 과정은 짜릿하고 씁쓸하다. 영화 ‘찌라시:위험한 소문‘(감독 김광식)이 보여주는 세계, 일명 ’찌라시‘로 보는 한국 사회 이면의 정치경제학이다.
‘찌라시’. 어지름, 흩뜨려 놓음, 광고로 뿌리는 전단이라는 뜻의 일본어 ‘ちらし’를 소리나는 대로 우리말로 표시한 단어다. 흔히 증권가에서 비밀리에 유통되는 미확인 혹은 출처 불명 정보들을 모은 비공식 간행물을 뜻한다. 정치, 기업, 연예 등 사회 각 분야의 소문과 동향, 스캔들 등 각종 정보가 수록돼 있다. 이 ‘찌라시’는 누가 왜 만들고 어떻게 유통되는가? ‘찌라시’는 찌라시의 실체를 소재로 한 첫 한국영화다.
영화에 따르면 기업체의 정보 담당 임직원과 국회의원 보좌관 등 정치 관계자, 국가 기관 요원 등 다양한 인사들이 서로 멤버를 엄선해 폐쇄적으로 비밀리에 운영하는 주간 회의에 의해 ‘찌라시’의 정보가 생산된다. “기업인 아무개가 청와대 정책실 누구를 만난다더라”는 고급 정보부터 “A회장이 여배우 B양과 만나 어쨌다더라”는 은밀한 스캔들까지 오간다. 이렇게 생산된 정보는 일명 ‘공장’이라 불리는 사설 정보지 전문 업체를 거치면서 유료화돼 ‘구독자‘들에게 은밀히 배포된다. 영화 속에선 구독자들이 이메일과 비밀번호를 함께 전달받아 정보를 확인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여기에도 다양한 정보회의와 사설정보지 업체들이 있이 경쟁을 하며 시장을 형성한다.
영화는 한 연예 매니저를 주인공으로 해서 ’큰 그림‘을 그려간다. 자신의 일에 대한 열정과 재목을 알아보는 안목만큼은 누구보다 탁월한 매니저 ‘우곤’(김강우 분)은 신인 여배우 ‘미진’을 발탁해 모든 노력을 쏟아붓는다. 기존에 소속된 대형 기획사에 회의를 느낀 우곤은 자신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보여준 미진과 함께 독립해 밑바닥부터 계단을 밟아간다. 드디어 미진이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캐스팅되며 성공을 목전에 두지만, 찌라시에 실린 출처불명의 정보 하나가 모든 것을 앗아간다. 미진이 국회의원 ‘남정인’(안성기 분)과 스폰서 관계라는 섹스 스캔들이었다. 미진은 결국 죽음을 선택하고, 고인에 대한 애정과 책임감, 세상에 대한 분노, 정체불명의 상대에 대한 복수심에 휩싸인 우곤은 진실을 추적해간다. 그는 전직 기자출신이라는 사설정보지업체 사장(정진영 분)과 불법 도청 전문가 백문(고창석 분)을 거쳐 마침내 ‘판도라의 상자‘를 열게 된다. 추적의 끝에는 대기업과 청와대, 국회, 언론이 형성한 ‘커넥션’이 있었다.
‘또 하나의 약속’에서 극중 등장인물이 말한 바, “정치는 표면이고 경제가 본질”이라는 한국 사회의 ‘동학’은 ‘찌라시’가 최후에 이르는 결론과 다르지 않다. 과연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권력의 실체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정부 위의 정부’라는 가상의 실체를 내세웠던 영화 ‘모비딕’도 ‘찌라시’와 결국은 같은 결을 이루는 작품일 것이다. 다만 ‘모비딕’에서 미처 다 말하지 못했거나 에둘러 표현됐던 ‘실체’가 ‘찌라시’라는 매개를 통해 좀 더 또렷하게 모습을 드러낸다고 할까.
‘찌라시’는 오늘도 생산되며, 누구는 연예인들의 가십으로 소비하고, 어떤 이는 투자의 재료로 삼으며, 어떤 세력은 정치와 경제를 통제하기 위해 이용한다. 그리하여 찌라시는 관음과 물욕, 그리고 보이지 않는 권력의 동학이 이루는 ‘상품’이자 ‘자본’이 된다. 영화는 찌라시의 정보가 과연 진실인가 거짓인가, 누가 정보를 생산하고 조작하는가에 초점을 맞추지만, 짜릿한 스릴러 뒤에 남는 씁쓸함은 결국 ‘찌라시’를 생산하고 구독해야만 하는 사회의 불행 때문이 아닐까. 20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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