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이형석 기자]“사람은 자기가 믿고 싶은 걸 믿는 법이다.”
영화 ‘아메리칸 허슬’에서 주인공인 사기꾼 ‘어빙 로젠필드’(크리스찬 베일 분)의 말이다. 판타지 소설가 테리 굿카인드는 ‘마법사의 첫번째 규칙’에서 비슷한 말을 했다.
“사람들은 어리석다. 그들은 진실이라고 믿고 싶거나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거짓말을 믿는다”
사기나 거짓은 남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이르는 경구들은 많다. 독일의 문호 괴테는 “사람들은 그 누군가에게 속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를 속일 뿐”이라고 했다. 오스카 와일드는 사랑에 대해서도 냉소적이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속이는 것, 그것을 세상은 로맨스라고 부른다”고 말했다. 그는 “사랑은 스스로를 속이면서 시작되고, 남을 속이는 것으로 끝난다, 그것이 세상이 로맨스라고 부르는 것”이라고 부언했다.
19세기 영국의 문학비평가 윌리엄 해즐릿은 “인생은 잘 속아넘어간 한 편의 사기극이다. 사기가 성공하기 위해선 일상적으로, 중단없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앙드레 말로는 한 개인의 정체성을 그가 생각하고 드러낸 것이 아닌 숨기고 왜곡한 것에서 찾는다. 그는 “사람(의 정체성)은 그가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그대로가 아니라, 그가 (내면에) 숨기고 있는 것들로 규정된다”고 말했다. 표면에 드러난 뜻과 행위, 의식이 아닌,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하고 심연 속에 묻혀진 무의식, 곧 숨고 왜곡된 욕망에서 인간의 정체성을 규명하려 한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의 이론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많은 영화들이 ‘사기극’을 통해 서로 속고 속이는 세상과 인생의 본질을 보여주려 했다. 오는 3월 2일 시상식을 앞둔 아카데미상에서 무려 10개 부문에 후보로 이름을 올린 영화 ‘아메리칸 허슬’(감독 데이빗 O.러셀)도 또 한 편의 매력적이고 짜릿하며 흥미진진한 사기극을 미국영화사에 한 편 더했다.
이 작품은 1970년대 후반을 배경으로 ‘진짜’로 살아보고 싶으나, ‘가짜’로 행세해야만 하는 사기꾼들의 이야기다. 크리스찬 베일이 무려 20㎏이나 체중을 불리고 연기한 ‘어빙’이 주인공이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과시하듯 크리스찬 베일의 불룩해진 배를 클로즈업한 카메라는 주인공이 대머리를 감추기 위해 가발을 민머리 위에 꼼꼼하게 붙이는 장면을 다소 길고 장난스럽게 보여준다. 언제라도 바람에 날려 훅 하고 날아갈 것만 같은 가발만큼이나 가볍고 가짜인게 우리 인생이라는 이야기일까. 잘 갖춰입은 정장과 잘 이어붙인 가발만큼이나 허세와 허풍이 느껴지는 주인공은 세탁소를 여럿 운영하지만, 정작 돈 되는, 은밀한 ‘부업’은 대출사기다. 돈이 급한 이들에게 “대출주선을 해주겠다”고 꼬드긴 뒤, 선불로 알선료만 받아 챙기는 수법. 어느 파티에서 어빙은 매력적인 시드니 프로서(에이미 아담스 분)을 만나 한 눈에 빠진다. 운명적 만남이라고 불꽃을 튀긴 두 남녀. 여자 역시 천부적인 사기꾼 기질을 갖고 있었으니, 금새 의기투합해 판을 키워 사람들을 농락해간다. 시드니는 영국 귀족 출신으로 유력 권세가와 금융가에 ‘연줄’이 있다고 흘리고 다니다 누군가가 미끼를 물면, 어빙이 대출 알선 명목으로 거액의 수수료를 챙기는 식이다. 그러다가 이를 수사하던 FBI요원 ‘리치 디마소’(브래들리 쿠퍼 분)에게 꼬리를 밟힌다. 리치 다마소는 어빙 커플같은 ‘잔챙이’보다는 훨씬 더 큰 사냥감을 노리는 야망의 수사관. 그는 어빙 커플과 모의해 이들을 미끼로 시장과 국회의원, 마피아까지 엮는 ‘큰 그림’을 그린다. 작전은 실행되고, 어빙과 시드니, 리치는 서로 속고 속이는 사기와 사랑, 증오의 삼각관계로 얽혀 들어간다. 여기에 무개념, 정서불안, 막무가내, 자의식 과잉인 어빙의 아내 ‘로잘린’(제니퍼 로렌스 분)이 가세하고, 순진한 정치가 ‘카마인’(제레미 레너 분)이 연루되면서 사기극은 예측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달아간다.
오프닝 크레딧에 “이 영화는 어느 정도는 실화에 바탕하고 있다”는 자막이 오르고, 남자주인공은 “이제 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하며 여주인공은 “이제는 진짜로 살아보고 싶다”고 울먹인다. 램프란트의 모작품을 두고 어빙은 “모작꾼이 원작자보다 훨씬 더 솜씨가 좋다, 그럼 누가 가짜일까”라고 반문하고, FBI요원은 사기꾼보다 더한 사기를 벌여 사기꾼들을 낚으려 한다. 이쯤 되면 극중 인물들은 물론이고, 관객들마저 누가 누구를 속이는지, 누가 누구를 사랑하는지, 누가 진짜 나쁜 놈인지 혼란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영화는 이렇게 말하는 듯 하다. ‘뭐 어떠랴, 인생은 거대한 사기극인걸. 그만큼 흥미진진하며 짜릿해서 기꺼이 속아넘어가고 싶은 게 바로 인생이 아니냐’고 말이다. 그것은 거짓말을 진짜인 듯 늘어놓는 감독이나, 가짜를 진짜같이 연기하는 배우나, 그래서 2시간의 ‘환영’을 선물하는 영화나 마찬가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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