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리한 할리우드 애니메이션
성인 위한 농담·패러디 곳곳에 어린관객도 성별따라 차별화 권선징악의 뻔한 이야기 속 복잡한 메시지 담는 서사전략도
어린 아이들 보여 주려고 극장에 데려갔다가 부모들이 웃고 나왔다. ‘겨울왕국’의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는 엄마들이 자리를 못 떴고, ‘쿵푸팬더’를 보고 나오는 길은 아빠들이 더 즐거웠다. 6일 개봉한 ‘레고 무비’는 또 누구를 열광시킬까? ‘유딩(유치원생)’부터 ‘초딩(초등학생)’은 물론이고, 이들을 동반한 부모 세대까지 남녀노소 모두가 반할 만하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성인 남성들은 흠뻑 빠져들 가능성이 높다. 할리우드 애니메이션의 힘은 바로 이런 것.
한국에서는 유달리 맥을 못 추는 장르이지만, 역대 흥행작 상위권에 줄줄이 포진해 있고, 주요 시즌마다 1~2위를 다투는 할리우드 애니메이션은 치밀한 전략과 마케팅의 산물이다. 어린 관객에 대해서도 ‘성별’에 따라 전략을 차별화한다. ‘어린이용’에도 성인관객들만 알아차릴 수 있는 농담이나 인용, 말장난, 패러디 등의 성적, 언어적, 문화적 유머, 유희를 숨겨 놓는다.
최근 미국은 물론이고 한국에서도 대규모 흥행에 성공한 ‘겨울왕국’과 양국에서 동시 개봉한 워너브러더스의 ‘레고 무비’는 그 대표적인 경우다.
▶디즈니를 배신한 디즈니? ‘겨울왕국’의 비밀=‘겨울왕국’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공식’을 집약적으로 보여 준 작품이다. 유럽 고전동화를 각색했고, ‘백설공주’로 대표되는 디즈니 ‘공주영화’의 적통이며 브로드웨이 식의 뮤지컬이다. 하지만 지난해 이 영화의 예고 편을 비롯한 홍보와 마케팅이 시작되자 현지 주요 언론에선 말들이 많았다. 엘사와 안나 자매는 예고 편에서 눈곱빼기도 찾아볼 수 없었으며, 브로드웨이 식의 노래는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고, 사전 지식이 없이는 안데르센의 ‘눈의 여왕’이 원작임을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예고 편에는 빙판 위에 덩그러니 눈사람 ‘올라프’와 순록 ‘스벤’ 둘만 있었다. 두 캐릭터는 뮤지컬이 아니라 코믹 액션을 보여줬다. 왜 그랬을까?
디즈니가 소년관객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고도의 전략이었다. 디즈니는 지난 2009년 자사의 전통을 잇는 ‘공주와 개구리’를 개봉했으나 흥행은 기대 이하였다. 이미 관객들은 ‘슈렉’의 드림웍스, ‘토이스토리’ ‘업’의 픽사 같은 신흥 애니메이션 제작사들의 새로운 감각에 익숙해져 있던 터에 디즈니의 전통적인 공주 뮤지컬 영화가 쓴맛을 본 것이다. 이 영화의 실패로부터 디즈니가 얻은 결론은 명확했다. ‘소년관객들을 끌어들여라’. 그리고 소년들은 공주영화를 좋아하지 않으며, 뮤지컬 대신 액션을 선호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디즈니는 그림형제의 동화 ‘라푼젤’을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에 제목을 ‘탱글드’(Tangled)라고 붙여 2010년 개봉했다(한국에선 ‘라푼젤’로 개봉). 원작동화의 정체와 주인공의 성별을 숨긴 제목이었다. ‘겨울왕국’은 한 발 더 나아갔다. 원작동화 제목 ‘눈의 여왕’을 버리고 주인공을 전혀 짐작할 수 없는 ‘프로즌(Frozen)’을 내세웠다. 소년관객은 더 불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북미지역 개봉 첫주 기준으로 ‘탱글드’에선 39%가 남성이었던 데 반해 ‘겨울왕국’에선 43%까지 늘었다.
▶엄마와 함께 갈까, 아빠와 함께 볼까?=‘겨울왕국’의 개봉 직후 관람했다는 국내의 한 여성관객은 “같은 유치원생 자녀를 둔 엄마들이 모여 함께 극장을 찾았다”면서 “아이들도 즐거워했지만 영화가 끝난 후 더 즐거웠던 것은 바로 우리 엄마들이었다”고 말했다. 전반적인 반응도 다르지 않다. 실제 인터넷 영화 예매전문 사이트 맥스무비의 남녀별 예매 비중을 보면 42대58로 여성이 훨씬 높다. 이 비율은 ‘라푼젤’도 마찬가지다.
‘겨울왕국’은 5일까지 648만명을 동원하며 한국 개봉 애니메이션 중 최고 흥행기록 경신을 이어가고 있는데, 종전 역대 1위(506만명)였던 ‘쿵푸팬더2’의 남녀별 예매 비중 48대52와 비교하면 차이가 뚜렷하다.
▶‘레고 무비’, 할리우드 애니메이션 전략의 또 다른 결정체=할리우드 애니메이션이 구현하는 성인관객 대상 전략은 몇 가지로 나뉜다. 먼저 익숙한 대중문화의 인용과 패러디다. ‘슈렉’ 이후 보편화됐다. 두 번째로 권선징악이나 소년의 모험ㆍ성장담이라는 표면적인 주제나 메시지 밑에 한층 복잡한 의미와 맥락을 깔아놓는 서사전략이다. 예를 들어 ‘토이스토리2’에선 “누구나 특별한 존재”라는 말을 “누구나 특별하다면, 아무도 특별하지 않다는 것”이라고 받아치는 식이다.
6일 개봉한 ‘레고 무비’는 블록으로 잘 알려진 레고를 이용하고 3D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이다. 레고의 세상을 완벽하게 통제된 곳으로 만들려는 독재자이자 대기업 회장인 ‘로드 비즈니스’ 회장에 음모에 맞서 자유로운 세상을 만들려 하는 평범한 건설노동자 ‘에밋’의 활약을 그린다. ‘에밋’은 생김새로도 다른 레고 캐릭터와 구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지극히 보잘 것 없고 남다를 것 없는 존재이지만, 엉뚱한 예언자 ‘비트루비우스’에 의해 ‘저항의 피스(조각)’를 얻은 구원자로 지목된다. 에밋은 여전사 ‘와일드 스타일’을 비롯해 배트맨, 슈퍼맨, 건달프, 메탈비어드 등과 함께 비즈니스 회장과 싸운다. 1500만여개의 조각으로 만들어졌다는 영화 세트와 캐릭터가 이뤄내는 스펙터클과 컴퓨터 기술로 재현한 액션도 최고 수준이지만, 다양한 대중문화 아이콘을 활용한 유머나 이야기가 돋보인다. ‘매트릭스’에 대한 오마주부터 ‘팀아메리카’ ‘사우스파크’ ‘심슨’ ‘스타워즈’ 등 다양한 작품들이 인용되거나 연상되는 영화다. 무엇보다 불완전하고 혼란스러운 자유와 완벽하게 조화된 통제사회를 대비시킨 주제의식도 성숙하다. 그리고 이 애니메이션의 후반부 반전은 모든 할리우드 애니메이션이 바탕에 깔고 있는 ‘향수’를 직접 드러낸다. 디즈니 만화를 보고 자란 엄마들이 아이들 손을 잡고 극장을 찾듯, 레고를 조립하며 성장한 아빠들이 아들과 함께 이 작품에 열광할 만하다.
이형석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