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서상범 기자]소년은 분노했다. 북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된 전쟁에서 시시각각 들려오는 피난민들의 절규를 들으며 하루라도 빨리 전장에 나가길 바랬다. 바람은 생각보다 일찍 이뤄졌다. 가장 치열했던 낙동강 전투가 한창이던 1950년 8월 헌병모집 공고가 나왔다. 당시 부산 경남고등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던 배중현(81ㆍ사진) 옹은 18살의 나이로 헌병 7기 학도병(헌7학병)으로 지원입대했다.
배 옹은 “당시 부산지역의 중ㆍ고교생 1661명이 입대했었다”며, “다들 어린나이였지만, 조국을 구하고 가족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고된 훈련을 받았다”고 회상했다.
한 달이 조금 넘는 훈련기간을 거쳐 배 옹을 비롯한 헌7학병들은 전국 각지로 배치됐다. 배 옹도 헌병사단에 배치돼 각종 전투에 투입됐다. 서울 수복 후 전시 치안 유지는 물론, 포로관리 등 다양한 임무를 목숨을 걸고 수행했다. 대구지역에 머물 때에는 당시 병력이 주둔 중인 건물의 전선피복이 불타는 것을 목격하고 맨 손으로 화재를 진압한 공로로 사단장 표창을 받기도 했다.
배 옹은 “헌병은 한 몸과 같다. 전선에서 화려하진 않지만, 묵묵하게 소임을 다한 훌륭한 헌병 동지들의 이야기가 더 많다”고 말했다.
그는 흥남부두 철수 작전의 비화를 들려줬다. 중공군의 대반격에 군병력은 물론 10만명의 민간인들마저도 철수해야 했던 작전에서 당시 서울대 재학생으로 입대했던 고(故) 김성수 중위를 비롯한 헌병 부사관 2명이 3만명의 피난민들을 무사히 철수시켰다는 것이다. 배 옹은 “당시 김 중위가 동요하던 3만명의 피난민들에게 ‘군은 절대 당신들을 버리지 않는다’고 안심시켜 철수작전을 성공적으로 진행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이후 60여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배 옹은 여전히 기개 넘치는 학도병의 모습이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그는 당시 학도병들의 자료를 수집하고 발굴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배 옹은 “조국을 위해 젊음을 바쳤지만, 이름없이 사그라진 청춘들이 바로 학도병”이라며 “역사와 후세가 이들의 이름 한글자를 기억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죽는 날까지 자료 수집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