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이지웅ㆍ이슬기 기자] ‘띠리링’ 벨소리가 울리고 경광등이 번쩍였다. 시끄럽게 돌아가던 벨트 컨베이어가 멈췄다. 그곳에서 쏟아져 나오는 화물을 쉴 새 없이 들어 올리던 근육들도 이내 힘줄을 감추고 평온해졌다.

이달 5일 오전 1시 30분께 서울 금천구의 한 택배 물류터미널. ‘잠든 도시’의 ‘잠들지 않는 심장’ 처럼 수십 대의 화물트럭과 지게차로 쿵쾅거리던 그곳에도 새벽밥 시간은 그렇게 예고 없이 찾아왔다. 근무가 시작된 지 약 5~6시간 만에 주어지는 새참시간이었다. 지난밤 8시부터 물건을 나르느라 기운이 빠진 인부들은 이 때를 이용해 배를 채우고 숨을 돌린다.

공사장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다가 이곳까지 흘러들어오게 되었다는 김재철(54ㆍ가명) 씨는 “공사장 일에 잔뼈가 굵었다고 생각했는데 정신없이 물건을 내리고 쌓고 하다보면 금세 허기가 찾아온다”며, “아마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나면 이런 기분 일 것” 이라며 크게 웃었다.

하지만 이 반가운 시간이 마냥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동이 트기 전까지 물건들을 신촌, 하남 등 최종 배달지 별로 모두 분류해야 한다. 그래서 이곳의 새벽밥 시간은 30분 만에 스쳐 갈 뿐이다. 그래야만 어느 시골 할머니가 자식을 그리며 보냈을 김치보따리며, 누군가가 당장 내일 소개팅에 입어야 할지 모를 새 옷, 공장에서 뜨겁게 녹아내릴 플라스틱 원료까지 모든 물건들이 제 때 주인을 만날 수 있다.

택배회사의 새벽모습.
택배회사의 새벽모습.

김 씨는 “가끔은 식사시간이 너무 짧다고 느껴질 때도 있지만, 누군가가 이 물건들이 받아들 시간을 고대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런 맘이 쏙 들어간다”고 말했다.

연휴를 앞두고 택배 물량이 몰린 이날 식당에 차려진 새벽밥 메뉴는 얼큰한 돼지고기 무국. 여기에 콩나물 무침과 김, 무말랭이가 곁들여졌다. 하지만 식당에 둘러앉은 인부들에게 식판에 칸별로 놓인 밥과 반찬의 경계는 별 의미가 없어보였다. 이들은 저마다 배식을 받고 자리에 앉자마자 서둘러 뚝배기에 밥을 말기 시작했다. 밑반찬으로 주어진 김은 ‘김 가루’로 부서져 국밥의 고명이 됐다. 극심한 허기와 짧은 식사시간 탓에 몸에 벤 습관이다.

몇 달 전 군대를 전역하고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는 한동현(23) 씨는 이 삶의 현장에서 이제껏 몰랐던 진짜 ‘밥’ 의 의미를 배웠다. 한 씨는 “학생 때는 미처 몰랐는데 한참 일을 하다가 새벽밥을 먹을 때면 정말 몸에서 빠진 에너지를 충전하는 기분” 이라며 “밥맛이 꿀맛 이라는 이야기가 무슨 뜻인지 절절히 느끼고 있다”고 수줍게 말했다.

택배회사의 새벽모습.
택배회사의 새벽모습.

이렇게 새벽 허기를 달래고 나면 남는 시간은 10분 남짓. 이 틈을 이용해 물류센터의 인부들은 삼삼오오 모여 담배 한 모금의 여유를 만끽한다. 유일하게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면면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다. 인부들은 대학생부터 50대까지 다양했다. 각자의 소중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 기꺼이 새벽밥을 자처한 이들이다.

중소기업 사장이었던 정기현(43ㆍ가명) 씨는 얼마 전 사업이 망한 후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이 세계로 뛰어들었다. 정 씨는 “몸은 고생스럽지만 일당도 바로바로 나오고, 시급도 꽤 세서 이 일을 선택했다”며, “매일 열심히 일해서 내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 한 것 아니겠냐”고 주먹을 흔들어보였다.

택배회사의 새벽모습.
택배회사의 새벽모습.

친구들과의 배낭여행 비용을 마련하러 온 대학생 이진한(27ㆍ가명) 씨 역시 “내 힘으로 마련한 돈으로 여행을 떠나보고 싶었다” 며 속마음을 털어놨다.

아쉬운 30분의 새벽밥 시간을 보낸 이들은 다시 자신이 속한 컨베이어 라인으로 돌아갔다. ‘잠들지 않는 꿈의 심장’을 팔딱이며 이들이 들어올린 물건들은 동이트면 핏줄 같은 도로를 타고 전국에 퍼져 또 다른 행복을 전할 것이다.

yesyep@heraldcorp.com

택배회사의 새벽모습.
택배회사의 새벽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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