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들의 반란
모욕주고 희롱한 남자들 혼낸 것뿐인데 마치 연쇄살인·대역죄인처럼 몰린 그녀들 약자들의 분노·변화 향한 거센 열망으로…
타도의 대상이 되어버린 남성사회 십대소녀들의 열망·상처 그린 영화 ‘폭스파이어’ 어리고 가냘픈 소녀들이 바랐던 것은…
“왜 이 사회는 소녀 하나를 이토록 겁냈을까?”
여학생을 모욕하는 못된 남자 교사를 망신 주고, 조카를 성폭행하려던 삼촌을 흠씬 두들겨 패고, 여학생을 희롱하는 남학생들을 응징했던 일군의 십대 소녀들. 학교에서 쫓겨나 차를 훔쳐 달아나다 잡히자, 법정은 이 ‘비밀 소녀단’의 리더에게 징역을 명한다. 영화 속 화자는 왜 이 사회가 어리고 가냘픈 소녀 한 명을 잡아 가둘 수밖에 없었을까 묻는다. 프랑스의 세계적인 감독 로랑 캉테의 신작 ‘폭스파이어’(22일 개봉) 중 한 대목이다.
단순한 ‘해프닝’에 불과했을지 모르는 여성 몇 명의 ‘일탈’을 사회가 마치 연쇄살인이나 대역죄처럼 다뤘던 것은 이 영화에서뿐만은 아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리들리 스콧 감독의 1991년작 ‘델마와 루이스’가 있었다. 권위적인 남편과 반복되는 일상을 벗어나 잠깐 즐기자고 올랐던 두 여성의 여행길이 돌이킬 수 없는 ‘반란의 여정’이 됐다. 성폭행하려던 남자를 우발적으로 권총으로 쏴 죽인 까닭에 도망자 신세가 되고, 길 가던 청년에게 돈을 다 털려 무일푼이 되자 강도행각마저 벌인다. 경찰은 토끼몰이하듯 두 여성을 쫓고, 주인공들은 벼랑끝으로 질주한다. 1997년작인 독일 영화 ‘밴디트’도 남성 중심의 사회를 향한 여성들의 유쾌한 반란을 그린 로드무비였다. 교도소에서 만난 여죄수 4명이 록밴드를 결성해 기념공연을 준비하지만, 호송경찰의 성추행을 피해 탈주했다가 대대적인 검거작전 사냥감이 된다. ‘셋 잇 오프’(1996년)에선 강도와 한동네 산다는 이유로 해고당한 은행원, 유일한 꿈이었던 동생을 경찰 오발로 잃은 친구, 생계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아이를 뺏긴 미혼모 등 여성들이 생의 막다른 골목에 몰려 ‘은행털이’라는 최후의 선택을 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로랑 캉테 감독의 ‘폭스파이어’의 소녀들은 낯설지 않다. 어쩌면 델마와 루이스, ‘밴디트’ 여죄수들, ‘셋 잇 오프’의 은행털이범들의 ‘소녀시대’가 이랬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1950년대 중반, 미국 뉴욕의 한 중학교로부터 이야기가 출발한다. 여기에는 ‘렉스’(레이번 애덤슨 분)와 ‘매디’(케이티 코시니 분)를 비롯해 뭉쳐 다니는 몇 명의 여학생이 있다. 이들은 수업 중 여학생을 모욕한 수학교사의 차에 남몰래 음란한 내용의 낙서를 남겨 온 동네 웃음거리로 만든다. 이 사건을 계기로 소녀들은 비밀단체 ‘폭스파이어’를 결성한다. 소녀들은 “영원히 조직을 배신하지 않으며 조직과 다른 조직원들을 위해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다”며 “폭스파이어는 결코 뒤돌아보지 않으며 절대로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폭스파이어는 타오르고 타오른다”고 맹세한다.
폭스파이어에 가장 명확한 적이자 타도 대상은 ‘남자’이며, 유일한 동지이자 연대의 대상은 여성이다. 조카를 성폭행하려던 매디의 삼촌을 팬 일로부터 애완견판매점 앞 ‘동물 권익 보호’ 피켓 시위, 명품 옷가게 낙서 시위, 여자애들 희롱하는 남학생들 혼내주기까지 ‘활동’(?)을 이어간다. 그러다가 결국 리더인 렉스가 수감된다. 와해 위기를 맞았다가 렉스의 출감으로 다시 활기를 띤 폭스파이어는 허름한 농가를 사들여 아지트를 마련하고, ‘모든 고통받는 여자들의 쉼터’를 표방한다. 점차 범행수법을 대담화하던 이들은 한 상류층 가정을 대상으로 새로운 작전을 계획한다.
이 영화는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장밋빛 전망으로 충만했던 1950년대 미국의 이면을 들여다보면서, 몇 명의 소녀들이 남성의 사회를 향해 일으켰던 아주 작은 ‘혁명’에 관한 이야기를 담았다. 실제라면 신문 사회면 한 귀퉁이에서나 볼 법한 해프닝이지만, 영화 속 소녀들의 반란엔 약자들의 이글거리는 분노와 유리처럼 깨질 듯 연약하고 다치기 쉬운 연민, 변화를 향한 거센 열망, 서로를 향한 순수한 우정과 연대, 완벽한 공유를 통한 공동체 건설 등 ‘혁명’의 모든 본질적이고 이상적인 요소들이 갖춰져 있었다. 영화 ‘클래스’로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던 거장 로랑 캉테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 사회를 부수고자 나섰던 십대 소녀들의 열망과 상처를 건조한 시선으로 묘사하고 따뜻한 가슴으로 품는다. 1993년 출간된 조이스 캐럴 오츠의 소설 ‘폭스파이어: 소녀 갱의 고백’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영화 속 소녀들은 연약했지만 반란은 뜨겁고 강렬했으며 출발은 소박했다. 영화의 첫 장면, 여느 소녀들처럼 부모의 눈을 피해 한밤중 친구의 집에 찾아들었던 렉스는 말한다. “한 여자애가 곤경에 빠지면 다른 여자애가 들어줘야 하는 법이지.” 그렇게 그들의 하룻밤은 불꽃처럼 짧게 타올랐던 ‘소녀시대’의 첫날이 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