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혹적인 선·과감한 생략으로 세계적 명성 인체조각계의 거장 피노티… “감춰진 게 많아야 더 매력적” 그의 작품세계는…
날씬한 각선미를 지닌 여성이 다리를 꼬고 앉았다. 손에는 한입 베어 문 사과가 들려져 있다. 비록 몸체는 생략됐지만, 요염하고 매력적인 여성이 저절로 떠올려진다. 최소한의 신체 표현으로 더할 나위 없이 매혹적인 인체조각의 세계를 드러내고 있는 이 작품은 이탈리아 작가 노벨로 피노티(Novello Finottiㆍ73)의 대표작 중 하나다.
피노티는 칠흑(漆黑)처럼 빛나는 검은 대리석으로 매혹적인 여성조각을 빚어냈다. 작가의 뛰어난 역량을 읽게 해주는 이 조각의 타이틀은 ‘Non ci Indurre(다른 곳으로의 유도)’. 이탈리아는 물론 유럽 및 미주, 그리고 일본에서도 널리 알려진 작품으로, 각국의 주요 미술관이 소장 중이다.
유럽 현대조각계를 대표하는 작가 피노티를 이탈리아 중서부의 해변도시 피에트라 산타에서 만났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거장이지만 은발의 노작가는 더없이 나직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조근조근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스튜디오 또한 매우 작고 소박했다. 독특한 것은 고풍스런 12세기 성곽의 잔해가 남아있는 뒷마당이었다. 마당 곳곳에 놓인 피노티의 조각들은 성곽과 멋진 하모니를 이루고 있었다.
그에게 ‘Non ci Indurre’(1977년)의 생략기법에 대해 묻자 “너무 드러난 것보다는 감춰진 게 많아야 더 궁금하고, 매력적이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작가는 “미지의 예쁜 여성을 떠올리면서 작업했다. 무엇보다 몸의 디테일을 과감히 생략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고 했다.
완벽한 구도와 과감한 생략, 매혹적인 마무리의 3박자가 어우러진 이 작품에 대해 미술평론가 지안 로렌조 멜리니는 “많은 걸 상상케 하는 최고의 작품”이라며 “피노티야말로 마에스트로”라고 평했다. 일본의 한 미술관 관장은 이 작품에 반해, 곧바로 컬렉션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이후로도 그는 자칼의 날렵한 몸에 사람의 하반신을 절묘하게 연결시킨 ‘아누비스’, 사람 손과 작은 새가 부드럽게 결합된 ‘마법’ 등을 연신 발표하며 최고 작가 반열에 올랐다.
피노티의 모국인 이탈리아는 ‘조각의 나라’다. 반도 어디를 가나 대리석 조각들이 광장과 도시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 조각가들도 즐비하다. 르네상스 전반기와 전성기를 이끌었던 도나텔로(1386~1466)와 미켈란젤로(1475~1564), 베르니니(1598~1680), 마리노 마리니(1901~1980)를 배출한 나라가 곧 이탈리아다.
이탈리아 구상조각계에서 피노티는 ‘미켈란젤로, 마리노 마리니를 잇는 작가’로 꼽히고 있다. 24살의 어린 나이에 뉴욕에서 개인전(1964년)을 가진 그는 다수의 권위 있는 전시에 초대받아 작품을 선보였다. 1966년에는 세계 최고의 미술제인 베니스비엔날레에 최연소 작가로 참가했으며, 1984년에도 베니스비엔날레에 참여했다.
이 거장은 ‘성스러운 돌’이라는 뜻의 피에트라 산타와 베로나를 오가며 작업한다. 양쪽에 스튜디오와 공방을 두고 있다. 큰 작업은 주로 피에트라 산타에서 한다. 세계 최대, 최고의 ‘대리석 집산지’인 이곳은 헨리 무어, 보테로, 마크 퀸 같은 유명작가 조각을 제작하는 대형공방과 대리석 가게가 운집해 있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로도 이 아름다운 도시에서 하숙을 하며, 대리석 조각을 제작했다. 피노티는 미켈란젤로가 머물렀던 광장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작업을 구상하곤 한다.
그는 작품을 하려고 상상에 빠져들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했다. 남다른 아이디어가 떠올라 이를 작품으로 풀어나갈 때야말로 최고로 전율을 느끼는 순간이라며 “작은 선 하나에도 큰 덩어리 못지않게 공력을 기울인다. 사소한 선 하나지만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피노티는 자연과 인간을 순환고리처럼 연결시키길 좋아한다. 파뿌리에 인간의 손을 연결시킨다든지, 배추에 인간 두상을 어우러지게 하는 식이다. 동물과 인간도 수시로 하나로 된다. 이에 대해 그는 “인간 또한 자연에서 오지 않았는가? 본래 같은 곳에서 왔다고 믿기에 인간과 동물, 인간과 식물을 자연스럽게 연결시키고 있다. 벌써 40년이 지났는데도 이를 하나로 묶는 작업은 늘 설렌다”고 토로했다.
그러나 그는 투철한 사회적 메시지를 품은 작업도 종종 시도한다. 미술이 그저 나른한 세계로 빠져들어선 곤란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걸프전 여파로 동물과 새가 기름바다에서 무참히 죽어가는 것을 보곤 나약한 한 인간이 코브라(뱀)에 끌려가는, 센(?) 조각도 선보였다.
뿐만 아니라 삶과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의 문’ 앞에 선 인간을 표현한 역작도 제작했다. ‘해부학이 걸어간다’는 독특한 제목의 이 작품은 동양적 윤회사상을 품고 있어 이채롭다. 비평가 조르지오 디 제노바는 “동시대 조각가 중 최고의 경지에 올랐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평하고 있다.
피노티는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20년째 피에트라 산타에 머물며 독일, 룩셈부르크 등 유럽 미술계를 활발히 공략 중인 작가 박은선(48)과는 절친한 사이다. 동양의 명상적 세계를 드러내는 박은선의 추상조각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동양적 고요함과 세계성을 함께 지녀 ‘언제 봐도 멋지다’며 찬사를 퍼붓는다.
세계 각국에서 전시를 연 이 거장은 아직 한국팬들과는 만나지 못했다. 다행히 유수의 미술관이 그의 작품전을 추진 중이어서 조만간 피노티의 환상적이면서도 매혹적인 조형세계를 만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영란 선임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