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큰 서클
남자는 자유를 노래한다. 그의 연주와 목소리는 삶과 죽음, 환희와 고통, 기쁨과 슬픔을 자유로이 떠다닌다. 그의 영혼엔 정박지가 없었다. 여자는 자신이 겪은 세상을 온몸에 새긴다. 만나서 사랑했던 모든 것의 흔적을 문신으로 남긴다. 떠나가고 헤어진 것은 지우고, 새로운 만남과 사랑은 그 위에 그린다. 여자의 몸은 모든 인연이 닻을 내려 묵었다가 돛을 올려 떠나는 정박지다.
자유로운 영혼의 가수와 아름답고 순수한 타투이스트, 전혀 다른 삶을 살아왔던 두 남녀가 만나 사랑에 빠진다. 기쁨과 환희, 행복, 그리고 슬픔과 절망, 고통. 삶과 사랑의 모든 감정이 격렬하게 요동친다. 벨기에 영화 ‘브로큰 서클’(감독 펠릭스 반 그뢰닝엔)은 사랑의 찬란한 환희와 가슴 미어지는 이별의 슬픔을 담은 음악영화다. 사랑하는 두 남녀가 노래로 화음을 맞추는 음악영화이자 멜로드라마라는 점에서 영화팬들에겐 ‘원스’를 떠올리게 만드는 작품인데, ‘원스’가 긴 여운을 남기고 스쳐 지나간 바람이었다면, ‘브로큰 서클’은 삶을 송두리째 흔들고 간 폭풍우 같은 사랑과 상실의 고통을 그린다.
디디에(요한 헬덴베르그 분)는 ‘블루그래스’를 연주하는 밴드에서 밴조와 보컬을 담당한 뮤지션이다. 풀과 나무가 아무렇게나 자란 집 대신 캐러밴(캠핑용 트레일러)에서 생활할 만큼 어디에도 속박되지 않으려는 자유로운 남자. 그가 매료된 블루그래스는 1950년대 이후 미국에서 발달한 컨트리음악의 한 갈래로, 기타, 만돌린, 베이스, 밴조 등의 악기로 연주된다. 여느 때처럼 공연을 앞둔 어느 날 그는 매력적인 문신전문가 엘리제(벨 배턴스 분)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녀의 몸에 새긴 아름다운 나비처럼 그의 삶에 날아든 것이다. 두 사람은 첫눈에 서로에게 이끌리고, 디디에 밴드의 공연을 본 엘리제는 음악에 매료돼 밴드에 보컬로 합류하며, 디디에는 엘리제에게 청혼한다. 운명처럼 결혼까지 이르게 된 두 사람은 예기치 않은 임신으로 당혹스러워하지만, 세상에 나온 귀여운 딸 메이벨을 최상의 축복으로 받아들이며 부모로서 한없는 기쁨과 책임을 품어간다. 무대에서의 완벽한 화음과 두 사람의 뜨거운 사랑, 세상 누구보다 귀여운 딸아이. 행복은 완벽한 원을 이루며 세 사람의 삶을 감싸지만, 운명의 여신은 이를 오래 두고 볼 정도로 자비롭지 않았다. 딸이 암선고를 받아 짧은 투병 후 죽게 된 것이다.
영화는 어린 딸의 투병과 죽음을 고통스럽게 지켜보며 점차 비극의 혼돈 속으로 스스로를 몰고가는 디디에와 엘리제의 모습 한 편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그들이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지는 환희의 순간을 교차해서 보여준다. 삶이 열정으로 들끓고 사랑으로 충만할 때는 서로 다른 관점과 태도, 방식은 서로에게 행복의 근거가 됐지만, 상실의 고통과 비극 앞에선 서로를 할퀴는 발톱이 되고 비수가 됐다. 디디에는 ‘자유’라는 이름으로 쳐놓았던 세상에 대한 완강한 보호막 속으로 다시 은둔하고, 엘리제는 ‘타투’라는 상징과 종교적 미신으로 도피한다. 누군가를 사랑함으로써 세상에 뻗었던 두 사람의 손은 다시 각자의 방향으로 거두어진다.
삶과 죽음, 결합과 분리, 만남과 이별 등 영화의 모든 주제를 표현하는 블루그래스의 선율이 극적인 매 순간마다 관객의 심장을 파고든다. 시간 순서를 뒤섞으며 각 사건의 전개를 교차시키는 구성 방식이 음악만큼이나 매혹적이다. 올해 베를린국제영화제 파노라마 부문 초청작이며 관객상과 유로파 시네마 레이블상을 수상했다. 벨기에에선 유명한 두 주연배우의 연기와 노래, 그리고 감독의 연출력이 조화를 이룬 수작이다. 31일 개봉. 청소년관람불가.
이형석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