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이영란 선임기자] 무릇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는 소멸을 향해 달려가게 마련이다. 또 사라지는 것이 있으면 새롭게 생성되는 것도 있다. 해가 지면 달이 뜨고, 달이 지면 다시 또 해가 떠오르듯 말이다.
화가 이정걸은 바로 이 소멸과 생성을 그린다. 강렬한 붉은 색채가 빛을 발하는 신작 ‘타임 슬라이스(Time Slice)’에는 천천히 소멸을 향해 가는 인간의 모습이 마치 영화필름처럼 세밀하면서도 입체적으로 담겨져 있다.
우리 모두가 지금 이 순간 이토록 화려한 순간을 맞고 있지만 언젠가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음을 작가는 작은 점과 비정형의 면이 무수히 반복되는 실험적인 작품을 통해 보여준다.
경희대 서양화과를 나와 양평에 둥지를 트고 전업작가로 활동 중인 이정걸은 엄청난 공력을 요하는 아날로그적인 수(手)작업과, 컴퓨터를 활용한 디지털 기법을 동시에 구사한다. 전통적인 서양화 붓질과 컴퓨터 그래픽을 결합해가며 환상적인 화폭을 창출해내는 것.
작가가 ‘타임 슬라이스(Time Slice)’라고 명명한 고유 기법은 영화 ‘매트릭스’처럼 변화하는 장면을 입체적으로 순간순간 분절시켜 묘사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다. 그는 또 온갖 재료를 활용해가며 작업한다. 농가의 버려진 천막을 가져와 이에 여러 겹 물감을 입히며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기도 하고, 골판지 시트지 롤러 주사기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해가며 캔버스에 입체적인 마티에르를 구현하기도 한다.
이같은 다양한 기법을 넘나들며 제작한 대작 회화 등 30여점의 신작을 모아 이정걸은 오는 23일 서울 관훈동 인사아트센터에서 작품전을 연다. 이번이 다섯번째 개인전으로, 대표작인 ‘Time Slice’시리즈를 비롯해 매혹적인 노란색 추상화, 화면 속에서 인간 형상이 부드럽게 어른거리는 작품 등이 출품된다.
이정걸은 새로운 기법의 회화실험에 열중하던 중 작업실에서 발생한 큰 불을 경험하기도 했다. 작가는 “화재 이후 내 작업이 크게 달라졌다. 소멸에 큰 관심을 갖게 된 것이 그 변화다. 지금 우리는 저마다 싱그런 생명을 지닌 존재이지만, 누구든 소멸을 피할 수 없다. 모두 ‘필멸의 존재’이니까. 그러나 소멸을 그리면서 나는 그 흔적에 깃든 새 생명의 불씨를 보곤 한다. 생명이 있으면 소멸이 있고, 소멸이 있으면 곧 새로운 생성이 있게 마련이다. 무수히 반복되는 시간의 연속이 곧 세상의 존재감이며, 그렇게 반복되는 ‘소멸과 생성의 비밀’을 나만의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 이번 작업들이다"고 밝혔다.
소멸의 시간 속 ‘흔적 채집자’로서 작가의 또다른 실험과 도전을 보여주는 이정걸의 개인전은 오는 29일까지 열린다. 02)73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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