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여
중심 편입 못한 존재의 좌절감 88만원 세대·삼포 세대의 단면 자기비하적 단어 ‘잉여’로 함축
현피 소재 웹툰 ‘아빠타’ 영화 ‘잉투기’ 괴이하고 찌질하고 한심한… 잉여세대의 초상 적나라하게 그려
#1 만화 주인공 ‘조석’. 체중이 115㎏이나 나갈 스무살 무렵, 인터넷 채팅에서 인사를 나눈 미모의 여성과 실제로 만나기로 하고, 열심히 운동을 한다. 아빠가 무슨 일이냐고 물어 사실대로 말하고 상대 여성의 사진을 보여주니, 아빠가 “대신 나갈까”라고 묻는다. 조석은 여성의 사진을 봤고, 아직 상대는 조석의 얼굴을 모르는 상태. 아빠는 아들 대신 만남 자리에 나서기로 한다. ‘아바타’가 아니라 ‘아빠타’다. 둘은 열심히 작전을 짜고 드디어 만나기로 한 장소에 간다. 그런데 예쁘장한 상대 여성이 다짜고짜 주먹을 날리고 발길질을 한다. 비밀 작전을 짠 대로 아들은 아빠에게 휴대폰 문자 메시지를 보낸다. “그년 X년이에요. 지가 무슨 격투기 배웠다고 격투기 커뮤니티에서 깝치길래(깝죽거리길래) 구라(허풍)치지 말라고 했거든요. 길로틴 초크를 실전에서 쓸 줄 안다고 나 참 구라치는데…제가 뻥치지 말라고 하니까 지가 진짜 보여준다고 나오라고…….” 아빠는 상대 여성에게 속수무책으로 폭행당해 쓰러지고, 그 위로 아들의 문자메시지가 계속된다. “어 진짜 (길로틴 초크를) 쓸 줄 아네” “아빠 그냥 나와요” “안 되겠네” “죄송해요” “기저귀 사올 게요”. 네이버 연재 웹툰인 작가 조석의 ‘마음의 소리’ 중 ‘아빠타’ 편이다. ‘소개팅’인 줄만 알고 아버지가 아들 대신 나갔던 자리가 실제로는 ‘격투 대결’을 위한 것이었다는 내용이다.
#2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칡콩팥’이라고 활동하는 이십대 후반 청년 태식(엄태구 분)은 온라인 게임 아이템을 현금으로 팔기 위해 누군가를 만나러 나간 자리에서 정체모를 습격을 당해 된통 얻어맞는다. 알고 보니 같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사사건건 비방전을 벌이며 대립하던 아이디(ID) ‘젖존슨’이라는 인물의 계략이었다. 태식이 무방비로 구타당하는 영상은 유튜브를 통해 순식간에 퍼져나가고 태식은 네티즌 사이에서 웃음거리가 된다. 치욕감과 분노에 휩싸인 태식은 복수를 위해 격투기 도장에 다니기 시작하고, 와중에 ‘격투소녀’ 영자(류혜영 분)를 만난다. 학교에선 ‘왕따’인 영자는 ‘먹방(진행자가 시종 음식을 먹으며 실시간으로 시청자와 채팅을 하는 인터넷 방송)’으로 소일하는 괴짜 여고생으로, 그녀의 도움을 받아 태식은 수수께끼의 인물 ‘젖존슨’의 실체를 찾으러 나선다. 간신히 ‘젖존슨’의 정체와 행방을 알게 되지만, 번번이 만남이 무산된다. 결국 태식은 영자의 ‘먹방’을 통해 ‘젖존슨’에게 공개 결투를 제안한다. 그 자리는 ‘잉투기’라고 불리는, 네티즌들끼리의 격투대회였다. ‘잉투기’는 ‘잉여들의 격투기’의 줄임말. 신인감독인 엄태화의 데뷔작 ‘잉투기’(11월 14일 개봉)의 내용이다.
웹툰 ‘마음의 소리-아빠타’편과 영화 ‘잉투기’는 이른바 ‘현피’를 소재로 한 영화다. ‘현피’란 ‘현실’의 앞 글자인 ‘현’과 ‘플레이어 킬(Player Kill)’의 앞글자인 ‘P’의 합성어로 온라인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오프라인으로 옮겨와 실제의 살인, 싸움으로 이어지는 것을 나타내는 신조어다.
‘현피’의 주체는 ‘잉투기’에서 지칭하는 대로 이른바 ‘잉여(인간)’들이다. ‘잉여’란 사전 그대로 ‘쓸모없는 나머지’라는 뜻이다, 학업이나 취업이 좌절돼 아예 포기해버렸거나 이에 뜻을 두지 않게 된 젊은이들이 하루 종일 컴퓨터나 인터넷으로 게임이나 채팅, 서핑 등으로 시간을 하염없이 보내는 자신들을 자조적으로 가리키는 말이다. 학업경쟁에서 도태되고, 취업시장에서 고배를 마시고, 온라인 공간에서나 ‘서식’할 수밖에 없는, 88만원 세대와 ‘3포세대(취업, 결혼, 출산을 포기한 세대)’의 단면이자 초상이 바로 ‘잉여’라는 단어에 함축돼 있다. 이들이 보내는 시간이 ‘잉여’이며, 이들이 골몰해서 하는 일은 ‘잉여짓’이고, ‘무쓸모’한 일에 매달리는 정도가 ‘잉여력’이다. ‘잉여’는 주류, 즉 쓸모 있는 중심에 편입하지 못한 존재들의 좌절감과 패배감을 뜻하는 자기 비하적 표현이라 할 것이다. 이는 최근 한국 대중문화 저류에 흐르는 감성이기도 하다. 몇 년 전부터 젊은이들의 유행 문화가 된 웹툰은 흔히 ‘잉여세대’를 주인공으로 하고, ‘잉여세대’에 의해 소비된다. 평균이하의 무쓸모한 도전을 담는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은 다른 말로 하면 ‘잉여’들의 ‘잉여짓’을 상징하고 대표하는 셈이다.
‘잉투기’는 ‘잉여세대’의 초상을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스크린에 적나라하게 그린 작품이다. 기성세대가 보기에 영화 속 주인공들은 해괴한 망상에 빠져있고, 이해 못할 행동을 일삼는다. 괴이하고 한심하고 ‘찌질’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잉여세대가 온라인의 망상으로부터 벗어나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현실에 부딪치고, 성장하려는 안간힘이 담겨진다. ‘잉투기’는 전에 볼 수 없던 잉여세대의 기발한 ‘성장담’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