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하지마! 하지말라고! 이런 것 좀 하지마”
‘꽃보다 할배’ 시리즈와 ‘삼시세끼’를 통해 새로운 예능 아이콘으로 떠오른 이서진은 사실 기존의 예능 프로그램에 어울리는 방송인은 아니다. 웃기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엔 더욱이 어울리는 캐릭터는 아니다. 이를테면 어르신을 모시고 여행을 떠난다거나 삼시세끼 밥을 차려먹는다거나 하는 큰 틀이 정해진 상황 안에서 묵묵히 지켜볼 때 본연의 모습이 나오며 웃음을 유발하는 타입이었다.
그런 이서진이 SBS ‘일요일이 좋다-런닝맨’을 찾았다. 매회 주어진 게임을 치열하게 임해야 하는 게임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서 이서진은 독보적인 투덜거림으로 멤버들을 쥐락펴락했다.
만사가 귀찮은 듯 보였던 이서진의 ‘런닝맨’ 출연은 영화 ‘오늘의 연애’에 특별출연한 것을 계기로 이뤄졌다. 누군가에겐 영화홍보를 위한 자리였으나, 이서진에겐 “난 특별출연인데 왜 내가 홍보를 하냐”는 이야기도 나올 법한 상황이었다. “진짜 오기 싫었다”는 이서진은 딱히 의욕도 없다는 듯 시종일관 투덜거렸다. “난 못 뛰니까 나부터 뜯으라”는 이야기를 서슴없이 할 정도였다.
‘런닝맨’에서 이서진이 가장 많이 했던 말은 “하지마”였다. “‘세끼’ 형”이라며 이서진을 반기는 유재석의 과장된 인사도, 몸개그가 주무기인 이광수의 활약도, 상황마다 콩트식으로 연결하는 지석진, ‘이서진 삼행시’를 지었다는 하하에게도 이서진은 내내 “하지마, 이런 것 좀 하지마”, “하지말라고”라고 울부짖을 뿐이었다.
진짜 몸을 써야할 상황에서도 이서진은 다른 사람과는 정반대로 느긋한 모습에 대충 임하는 모습을 보여 ‘런닝맨’ 멤버들의 울화통을 터뜨렸다. 오디오가 물린 상황에서 이서진이 게임에 임하는 모습을 볼 때 하하는 “저렇게 설렁설렁…”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김종국의 이야기에 따르자면 이 프로그램은 “멤버들이 정말, 너무너무 열심히 하는, 다른 어떤 프로그램에서도 이렇게 열심히 하는 출연자는 없는 방송”이다. ‘관찰예능’이 대세로 접어든 때에도 ‘버라이어티 게임쇼’로 한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런닝맨’은 사실 출연자들이 해야할 일이 많은 프로그램이다. 제작진이 만들어놓은 게임 안에서 어떻게든 이기기 위해 승부를 겨뤄야 한다. 애초에 ‘승부욕’이 바닥이고, 버라이어티에 익숙하지 않은 출연자라면 ‘런닝맨’은 쥐약인 셈이다.
특히 ‘런닝맨’의 유치한 게임 버라이어티를 살리는 재미요소 중 하나인 CG(컴퓨터 그래픽)를 활용해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상황 설정은 김종국 이광수 하하 등 멤버들이 과장된 몸짓과 말투로 ‘예능끼’를 발휘하는 순간이나, 이서진에겐 이 같은 상황은 당혹스러워보였다. 예를 들자면, ‘런닝맨’의 역대급 게임었던 ‘시간을 거스르는 자’와 같은 설정이다. 비슷한 상황이 주어지자 이서진은 급기야 “별 것도 아닌 걸 왜 이렇게 거창하게 하냐”고 투덜댔을 정도다.
이서진이 새로운 예능 아이콘으로 부상하게 된 것은 나영석 PD가 추구하는 예능 스타일에 부합했기 때문이다. “억지로 웃기려고 하지 않는 것”이 바로 그 스타일다. 나 PD는 자신의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연예인들에게 딱 한 가지를 요구한다고 했다. “웃길 필요도 없고, 농담할 필요도 없다. 다만 이 상황에 몰입해서 열심히만 해달라”는 것이다. 그 안에서 이서진은 본인 자체의 성품상 “윗사람에겐 깍듯하게 잘 하지만, 그 이외의 모든 상황엔 불평하는 캐릭터”가 그대로 비쳤다. 그러면서도 의외로 몰입도가 뛰어나 할 건 다 하는 캐릭터다.
‘런닝맨’에서도 그 양면성이 비쳤다. 극강의 투덜거림으로 유재석으로부터 “야! 이서진 나와, 누가 섭외했어”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천하의 국민MC를 귀찮다는듯 프로그램 내내 밀쳐내면서도 마지못해 멤버들과 합을 맞췄다. 모든 출연자가 자신의 팀원을 열광적으로 응원하자 유재석도 자신의 파트너인 이서진에게 “나도 응원해달라”고 요청했고, 이서진은 급기야 “잘해 잘해”라고 퉁명스럽게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정작 몸을 많이 쓰지 않아도 되는 게임 앞에선 초집중 눈빛을 발산하며 게임에 임해 멤버들의 먹잇감이 되기도 했고, 몇 편의 예능을 통해 이서진의 캐릭터를 파악한 시청자에겐 그의 양볼에 움푹 패인 보조개로 인해 이서진이 꽤나 ‘런닝맨’ 출연을 즐거워하고 있다는 것이 비쳤다.
프로그램 안에서 이서진이 가장 자연스러웠던 장면은 유재석과 차로 이동 중 8090 나이트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었다. 연출도 없고, 게임도 없이 오로지 둘만 있던 그 상황에서 이서진은 한 마디로 말문이 터졌다. 유재석과 당시 ‘나이트 음악’에 대한 공감대를 쌓으며 이서진은 처음으로 카메라가 없는 상황에서의 자신의 모습을 비췄다.
천하의 투덜이였고 아무런 의욕도 없어보인 이서진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프로그램엔 몰입했다. 급기야 이날 ‘런닝맨’의 우승자는 이서진과 유재석이었다. 이서진은 우승 상품으로 받은 ‘R반지’를 조카에게 주기 위해 하나를 챙기고, 유재석의 반지를 빼앗아 문채원에게 줬다. 그러면서 희대의 명언을 하나 남겼다. “‘런닝맨’ 싫었는데 더 싫어졌다.”
방송 사상 유일무이한 투덜이 캐릭터로 '호감 연예인'이 된 이서진의 등장에 '런닝맨'도 활짝 웃었다. 12일 시청률 조사회사 닐슨코리아의 집계에 따르면 전날 방송된 SBS ‘일요일이 좋다’의 2부 코너 ‘런닝맨’은 15.8%의 전국 시청률을 기록하며, 동시간대 최강자 ‘1박2일’(15.9%)의 뒤를 바짝 좇았다. 전주 ‘1박2일’ 결방 당시 ‘런닝맨’은 17.8%의 시청률을 기록했으나 이는 동시간대 경쟁을 피했기에 의외의 시청률이 가능한 결과였고, 제대로 맞붙은 이번 회차는 ‘런닝맨’의 반등이 단연 돋보인다.
shee@heraldcorp.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