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 이후 국내 걸그룹 대규모 약진

뉴진스, 데뷔전 서머소닉 페스티벌 입성

아이브, 오리콘 주간·데일리 차트 1위

르세라핌 1집 日 레코드협회 골드 인증

K-팝 ‘뉴아르’ 日 걸그룹시장 접수하다
일본 현지에서 K-팝 걸그룹의 기세가 예사롭지 않다. 트와이스 블랙핑크가 닦아준 기반 위로 뉴진스(사진) 등 4세대 걸그룹이 날개를 펼치고 있다. [어도어 제공]

일본 최고의 ‘연말 이벤트’로 자리 잡은 공영방송 NHK의 가요 프로그램 ‘홍백가합전’. 지난해 이 프로그램에 K-팝 걸그룹이 무려 세 팀이나 출연했다. 2017년(68회), 2018년(69회), 2019년(70회)에 이어 네 번째 ‘홍백가합전’에 입성한 그룹 트와이스를 필두로 4세대 K-팝 걸그룹 아이브와 르세라핌이 현지에서의 정식 데뷔도 전에 이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홍백가합전’에 한국 가수가 두 팀 이상 출연한 것은 2011년(동방신기·소녀시대·카라) 이후 11년 만이었다. 김진우 써클차트 수석연구위원은 “일본의 대형 걸그룹인 AKB48은 3년 연속 이 무대에 서지 못했는데, 지난해 K-팝 걸그룹이 세 팀이나 출연했다는 점은 굉장히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일본 현지에서 K-팝 걸그룹의 기세가 예사롭지 않다. 일찌감치 일본을 석권한 트와이스·블랙핑크가 닦아준 기반 위로 4세대 걸그룹들이 날개를 펼치고 있다.

세계 2위 규모의 음악 시장인 일본은 K-팝에 있어서도 중요한 지역이다. 음악 스타트업 스페이스오디티가 운영하는 K-팝 데이터 서비스 케이팝레이더에 따르면 일본은 지난해 K-팝 소비 국가 1위(7.5%)에 올랐다. 팬데믹 전인 2019년만 해도 K-팝 소비 5위에 머물렀으나, 3년 사이 엄청난 변화가 일었다. 이 기간 유튜브 틱톡 등의 동영상 플랫폼을 통한 K-팝 확산이 지금의 결과를 이끌었다.

일본에서 인기있는 K-팝 그룹은 단연 방탄소년단(BTS)이다. 방탄소년단은 전체의 27.2%로 현지에서 가장 인기있는 K-팝 그룹 1위에 올랐고, 그 뒤로 트와이스(14.0%)가, 세븐틴(5.0%)이 올랐다.

흥미로운 점은 지난해부터 4세대 K-팝 걸그룹이 약진하고 있다는 점이다. 팬데믹 기간 데뷔한 4세대 걸그룹은 국내 시장부터 장악하기 시작, 글로벌 무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특히 국내 K-팝 4세대 시장을 점령한 이른바 뉴아르(뉴진스, 아이브, 르세라핌)를 향한 일본의 관심이 지대하다.

르세라핌과 아이브는 올 상반기 일본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걸그룹이었다. 르세라핌은 일본을 완전히 평정할 기세다. 일본 레코드협회의 발표에 따르면, 르세라핌의 정규 1집 ‘언포기븐’은 5월 기준 누적 출하량 10만 장을 넘겨 ‘골드’ 인증을 획득했다. 한국에서 발매한 음반으로 일본에서 ‘골드’ 인증을 획득한 것은 르세라핌이 처음이다. 이 앨범으로 르세라핌은 이미 일본 오리콘 차트의 주간 앨범 랭킹, 주간 디지털 앨범 랭킹, 주간 합산 앨범 랭킹 3개 부문 1위를 석권했다. 빌보드 재팬의 ‘핫 앨범’, ‘톱 앨범 세일즈’, ‘다운로드 앨범’ 차트(집계기간 5월 1~7일)에서도 1위에 오르며 일본 주요 음악 차트 6관왕을 달성했다.

아이브도 마찬가지다. 아이브가 지난달 31일 일본에서 발매한 첫 앨범 ‘웨이브’는 오리콘 주간 앨범 랭킹 1위(6월 12일자), 데일리 앨범 차트(5월30일~6월5일 자)에선 7일 연속 1위에 올랐다. 뿐만 아니라 일본 타워레코드 전점 종합 앨범 차트(5월29일~6월4일) 1위, 빌보드 재팬 주간(5월29일~6월4일) 톱 앨범 세일즈 차트 1위를 기록했다.

뉴진스는 아직 일본에서 데뷔하지도 않았지만, 빌보드 재팬 2023년 상반기 차트에서 K-팝 최고 순위인 17위(‘디토’)에 자리했고, 이 차트에 K-팝 아티스트 최다인 세 곡(‘디토’, ‘OMG’, ‘하입 보이’)을 올려놨다. 올초 발매한 한국 앨범(싱글 앨범 ‘OMG’)으로 오리콘 주간 합산 싱글 랭킹 정상을 차지했고, 해외 여성 아티스트로는 가장 빠른 속도로 오리콘 누적 스트리밍 단일곡(‘디토’) 1억 회를 달성했다. 소속사 어도어 측은 “싱글 앨범 ‘OMG’를 통해 뉴진스의 일본 내 인기가 본격화되면서 뉴진스의 데뷔곡들까지 뒤늦게 ‘톱 10’에 안착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K-팝 걸그룹이 일본 시장을 점령한 데에는 ‘팬데믹 수혜’가 따랐다. 김진우 써클차트 수석연구위원은 “팬데믹을 거치며 특히 일본에선 내수 시장에 위기가 찾아왔다”며 “AKB48은 직접 만나러 갈 수 있는 친근한 아이돌을 캐치프라이즈로 삼았으나, 코로나19로 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하며 음반 판매량이 100만 장에서 30만 장으로 급감하는 등 타격을 입었다”고 말했다.

AKB48과 같은 대형 걸그룹을 비롯해 일본 내수 시장이 타격을 입은 상황에서 ‘인재 유출’이 이어졌다. “AKB48의 사쿠라(르세라핌)와 같은 주요 인재가 한국으로 넘어와 K-팝 그룹으로 활동하며 일본 걸그룹 시장에 공석이 많아졌다”는 것이 김 연구위원의 분석이다. 그 자리를 K-팝 걸그룹이 속속 장악 중이다.

현지에서 인기를 얻는 K-팝 걸그룹 중엔 일본인 멤버들이 속한 팀이 많다. 트와이스만 해도 모모 사나 미나 등 일본인 멤버가 세 명이나 있고, 르세라핌(사쿠라, 카즈하), 아이브(레이) 역시 일본 멤버들이 함께 활동하고 있다. 현지에서 높은 인기를 모으고 있는 케플러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데뷔한 케플러는 일본 걸그룹 알파버비즈로 데뷔했던 마시로, 일본 대형기획사 에이벡스 소속으로 걸그룹 멜티, 듀엣 크로스갱으로 활동했던 히카루 등 두 멤버가 속해있다. 케플러는 최근 일본 효고현 고베 월드 기념홀에서 열린 ‘아레나 투어’를 통해 무려 5만 관객과 만나며 현지에서의 인기를 입증했다.

자국 멤버의 유무와 관계없이 K-팝 걸그룹은 일본 걸그룹 시장의 틈새를 메우며 지분을 넓히고 있다. 뉴진스가 대표 사례다. 현지에서의 러브콜도 끊이지 않는다. 내달 1일 일본 니혼TV ‘더 뮤직 데이 2023’에 출연하고, 오는 8월 19일엔 일본 대표 음악 페스티벌 ‘서머소닉 2023’ 무대에 오른다.

현지 시장은 ‘청신호’다. 기세를 이어받아 하이브와 빌리프랩에선 새 걸그룹 데뷔 서바이벌 프로그램인 ‘알유넥스트’를 JTBC와 일본 아베마 TV에서 동시에 방송한다. 출발부터 잡고 갈 시장인 것이다. 김진우 수석 연구위원은 “65%가 CD 매출인 일본의 피지컬 시장에서 K-팝 걸그룹이 두드러진 성과를 내고 있다. 르세라핌 아이브 등이 지난달까지 좋은 성과를 냈고, 이들을 필두로 K-팝 걸그룹이 일본 현지에서 더 좋은 성적을 낼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고승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