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은미 연출 ‘디어 누산타라:잘란잘란’
‘몸의 언어’로 잇는 아시아 프로젝트
오디션 통해 인니 무용수 5명 선발
인니의 문화적 다양성, 역동성 담아
“새 시대에 맞는 아시아의 언어 필요…
지금 찾지 않으면 이 자리에 머물 것”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투명한 은빛의 구체를 줄줄이 매단 무대. 음악소리도 멈춘 적막 속에 한 쪽 끝에서 무용수가 등장한다. 녹색의 드레스를 입고, 아주 천천히 한 발 한 발을 떼 무대를 가로지르는 시간은 느슨한 긴장감으로 가득 찬다. 숨막힐 듯한 고요는 이내 반전된다. 참을 수 없는 비트와 함께 무대는 불을 켠다. 하나둘 등장한 무용수들은 한 쪽 다리를 구부리고 바닥을 쓸듯이 춤을 준다. 동작은 기묘하고 몸짓은 가볍다. 한국적 호흡에 이국적 춤이 만난 새로운 세계. 무대로 인도네시아가 들어왔다. 1만 7000개의 섬이 크고 작은 고무공이 돼 무대를 튀어다니고, 무용수들은 그것 위에 올라타 더 높이 도약한다. 역동적인 안무, 독특한 몸짓, 화려한 비주얼, 신구가 어우러진 음악… 안은미의 신작 ‘디어 누산타라:잘란잘란’이다.
최근 세종문화회관 ‘싱크 넥스트’의 마지막 공연으로 현대무용가 안은미의 신작 ‘디어 누산타라:잘란잘란’이 관객과 만났다. 실험과 도전에 두려움이 없는 안은미는 이 작품을 통해 다시 한 번 새로운 세계로 나아갔다
작품은 제목에서부터 ‘정체성’을 확연히 드러낸다. 누산타라는 ‘인도네시아의 새 수도의 이름’이고, ‘잘란잘란’은 인도네시아 어로 ‘산책하다’는 뜻이다. 제목은 “걸음에서 출발해 새로운 세계로 산책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디어 누산타라:잘란잘란’은 무려 1년여의 시간에 걸친 오디션을 통해 선발한 인도네시아의 무용수와 안은미컴퍼니가 선보인 ‘아시아 프로젝트’다. 인도네시아의 전통음악에 전자음이 어우러진 음악은 밴드 이날치의 장영규가 맡았다.
‘디어 누산타라:잘란잘란’은 안은미 그 자체이면서, 안은미 이상(以上) 의 세계를 보여준다. 그가 꾸준히 이어온 춤에 대한 철학과 정체성을 담으면서도 안은미가 나아가고자 하는 ‘새로운 미래’를 압축적으로 그린 무대다.
지난 30여년 ‘구체의 여신’으로 불린 무용수답게 무대에선 온갖 크기의 구체가 곳곳에 사용된다. 무대의 원형 발 장식을 시작으로 작은 탁구공, 다양한 크기의 고무공이 강렬한 메시지를 품고 등장한다. 구체는 실제로 상징적 의미를 품는다. 안은미는 “1만 7000개까지는 되지 않겠지만, 무대 위 구체는 인도네시아의 섬을 상징한다”며 “서로 다른 지리적 조건에서 살아온 인도네시아 사람들의 문화적 배경과 혼재된 다양함을 단층적인 이미지로 가져온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한국의 역동적인 이미지를 더했다. 인도네시아와 한국의 결합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다섯 명의 인도네시아 무용수들은 서로 다른 지역에서 각기 다른 언어와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성장했다. 인도네시아는 무려 1300개 이상의 소수민족이 발전시킨 3000개 이상의 독창적인 춤을 가지고 있다. 복잡다단한 인도네시아의 문화적 배경은 안은미와 만나 새로운 ‘몸의 언어’를 만들어냈다.
이 과정은 가차없고 험난하다. 안은미는 컴퍼니의 연습과정에 대해 “히말라야 꼭대기까지 올랐다 내려오는 마음으로 한다”고 말한다. 관객의 입장에서 이들의 몸짓은 너무 가볍고 경쾌해, 무척이나 편안해 보인다. 하지만 근육과 관절, 마디 마디가 하나씩 살아움직이는 역동적인 70분은 극한의 수련이 만든 결과물이다.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한 인도네시아 무용수 에이 레사르는 “안은미 선생님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알맞은 위치를 찾으세요. 오늘 할 수 없다면 내일 다시 시도 할 수 있습니다. 계속하세요’라는 메시지를 꾸준히 전달했다”며 “연습은 우리를 발전시킨다”고 말했다.
‘몸의 노력’이 만든 아름다움의 이상(理想)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람은 안은미컴퍼니의 무용수인 김혜경이다. 단단한 몸의 중심을 두고 손끝부터 어깨로, 발끝에서 골반으로 이어지는 살아있는 움직임은 십수년을 단련한 사람이 흘린 무수한 땀의 결실이다. 움직임은 단지 몸에서만 난오는 것은 아니다. 몸의 언어로 만들기 위해 자신의 이야기를 발견하는 자기계발의 과정을 온전히 스스로 거쳐야 한다. 그것이 안은미의 트레이닝 방법이기도 하다.
이들이 만든 ‘몸의 언어’는 온전히 나라와 나라를 이었다. 한국과 인도네시아를 연결했고, 두 나라를 뛰어넘어 ‘새로운 아시아’로 나아가는 과정에 있다. 다섯 명의 인도네시아 무용수 안에 잠재된 문화적 뿌리가 안은미의 방식을 만나, 안은미의 춤과 결합해 새로운 아시아의 춤을 만들어낸 것이다.
안은미는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아시아 언어를 개발하는 것이 필요했다”며 “지금의 K팝, K아트도 모두 혼합과 비빔밥의 정서에서 시작했다. 다양함이 섞이면 새로운 언어가 된다”고 강조했다.
‘디어 누산타라:잘란잘란’을 시작으로 한 안은미의 ‘아시아 프로젝트’는 이제 시작이다. 수십년간 무대를 지킨 ‘현역’ 무용수이면서, 비교할 수 없는 춤의 세계로 나아간 ‘선구자’이자 ‘도전자’인 그는 본격적으로 미래 세대를 위한 나무가 되길 자처하고 있다.
사실 안은미는 무용계, 음악계를 아우르며 시기마다 ‘뉴 웨이브’를 일으킨 주인공이다. 한국 밴드 최초로 미국 공영방송 라디오 NPR ‘타이니 데스크’에 출연한 씽씽의 이희문, ‘1일1범 시대’를 불러오며 전 세계를 열광케 한 밴드 이날치의 장영규와 안이호, 배우·화가 등 ‘전방위 예술가’로 활동하는 백현진, 파격과 힙을 더한 해파리 박민희…. 전통과 대중음악의 판을 완전히 뒤엎은 이들에겐 이른바 ‘안은미 픽(PICK)’이라는 공통분모가 있다. 공연예술계 관계자는 “안은미의 ‘너 특이하네. 우리 같이 해볼래?’ 그 한 마디와 안목으로 지금의 문화가 만들어졌다”고 말한다. 친구의 사촌동생으로 1980년대 후반 처음 만난 장영규와의 인연은 30년이 넘는다. 자기 밴드의 음악만 해오던 장영규는 안은미를 만나 처음으로 “타자를 위한 음악”에 발을 들였다. ‘안은미의 무용음악’을 만든 것에서 시작, 영화와 공연 음악, 이날치까지 작업은 뻗어갔다. ’조선 힙(Hip)’의 대명사 이희문은 “안은미 선생님이 나를 알아봐준 유일한 사람”이라며 “지금 하고 있는 모든 것을 배웠다”고 말한다.
문화예술계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가능성과 얼굴들을 발굴해온 안은미는 ‘아시아 프로젝트’와 함께 더 큰 세계로 향한다. ‘디어 누산타라:잘란잘란’을 통해 인도네시아 자카르타까지 날아가 무용수들을 발굴한 것도 그 시작이다.
그는 “예술적 사조 안에서도 그 이후의 세계를 만들어야 하는 의무가 있다”며 “다양한 분야에서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내는 아시아 중심의 사고, 아시아 르네상스가 와야 한다. 지금 새로운 아시아의 언어를 찾아내지 않으면 이 자리에 머물게 된다. 내가 무언가 줄 수 있는 언어가 있다면 아는 것만큼 전달해야 하는 때라고 본다”고 말했다. 한 시대에 머무르지 않고, 한 국가의 장벽에 갇히지 않고, 시대와 국가, 전통과 현대를 넘어 소통하고 회복하는 ‘공존의 춤’이 안은미와 함께 시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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