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가곡 명맥 잇는 ‘가곡 어벤저스’
5개 민간 오페라단 단장 총출동
‘한국 가곡 세기의 콘서트’로 가곡 부활
1970~80년대 전성기 맞다 변방으로…
교육ㆍ정책 부재…정글로 나와 경쟁 뒤쳐져
다양한 지원ㆍ무대로 토양 마련해야…
우리 시대에 전하는 가곡의 ‘강력한 힘
“‘시대공감’과 ‘위로와 소통’…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어린시절 여름밤 고향집 마당엔, 할아버지의 밀대방석, 할머니의 부채바람, 모깃불 속 쑥향기 마을로 퍼지고, 실개천의 물소리 자장가 삼아…” (가곡 ‘여름밤의 추억’ 중)
시(詩)가 선율을 입으면, 지나간 기억을 불러온다. ‘시인의 언어’는 깊은 정서를 담은 아름다운 음악과 만나 ‘어떤 날’로 데려간다. 윤석구가 시를 쓰고, 윤학준이 곡을 쓴 ‘여름밤의 추억’은 아득한 기억에 남아있을 할아버지, 할머니와 보낸 어린시절을 그린다. 가곡은 바람소리, 물소리에 실려 시간여행을 떠나게 한다.
“한국 가곡을 관통하는 한 단어는 그리움이라고 볼 수 있어요. 1922년 박태준의 ‘고향생각’부터 최영섭의 ‘그리운 금강산’, 최근 가곡인 윤학준의 ‘마중’까지…. 한국 가곡의 명맥을 잇는 것은 염원과 한의 정서를 담은 그리움에서 시작해 세월이 흘러 어떤 사람, 어떤 시절을 향한 그리움으로 스펙트럼이 확장되고 보다 다양해졌어요.” (하만택 코리아아르츠 대표·김은혜 코리아모던필하모닉오케스트라 단장)
시에 곡을 붙인 ‘가곡(歌曲)’은 시대의 감성과 정서를 담고 있다. 때로는 소박한 한 시절의 추억, 때로는 장구한 시대의 역사를 담아낸 언어는 음악을 만나 만개한다. 한 걸음 떨어져 있던 말들이 ‘감정의 선율’을, 추상적인 음악이 ‘구체적인 언어’를 만나자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됐다. 그것이 지난 100년간 우리 곁에 있던 ‘한국 가곡’이다.
한국의 첫 가곡인 홍난파의 ‘봉선화’가 탄생한 이후 100년의 시간이 훌쩍 지났다. 2년 전인 2020년 한국 가곡 100주년을 맞으며 음악계에선 제2의 가곡 르네상스를 꿈꾸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한국 가곡의 명맥을 잇고 있는 5개의 민간 오페라단도 뛰어들었다. 최근 서울 마포아트센터에서 한우리오페라단의 김흥완 단장, 코리아모던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김은혜 단장, 김자경오페라단의 정지철 단장, 서울오페라앙상블의 장수동 단장, 코리아아르츠의 하만택 대표를 만났다. 5개 단체와 마포문화재단은 한국 가곡 100주년을 맞으며 다시 한 번 K-가곡 붐을 위한 ‘한국 가곡 세기의 콘서트’를 기획, 오는 10월까지 6회의 릴레이 콘서트를 이어간다. ‘가곡 어벤저스’라 할 만하다.
■ 영광과 논란·전성기 지나 변방으로…한국 가곡의 오늘
한국 가곡의 역사는 긴 시간만큼 파란만장하고 고단했다. 영광과 상처가 공존한다. 1920년 이후 크고 작은 부흥기가 있었고, 작곡가들의 친일·월북·독재정권 부역 논란에 몸살을 앓았다. 1970~1980년대는 ‘한국 가곡의 전성시대’였다. 최고 시청률을 담보한 9시 뉴스 전엔 지금도 찾기 어려운 ‘가곡 뮤직비디오’가 방영됐고, MBC 대학가곡제가 히트 작곡가를 배출했다. 1981년 1회 대상 수상자가 현재의 K-가곡을 이끌고 있는 김효근 이화여대 교수다. 해마다 가을엔 ‘한국 가곡의 밤’ 무대가 관객과 만날 만큼 가곡은 ‘대박 콘텐츠’였다. 그러다 새로운 세대가 등장해 대중문화를 이끈 1990년대에 접어들며 가곡은 경쟁에서 밀려났다. 공교롭게도 대중음악 부흥기와 맞물렸다. 교육, 방송 등의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던 가곡이 난데없이 전쟁터로 떠밀린 때다.
“정글로 나가 상업적인 세계와 경쟁해야 하는데 경쟁력이 떨어진 거죠. 그들을 이겨내고 양립해야 하겠지만, 경쟁이 될 수가 없어요.” (정지철 단장)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이 돼버린 거예요. 자본주의 안에 가곡이 놓이니 그것의 가치보다는 시장의 논리에 밀려나고, 경쟁도 할 수 없는 구조가 된 거예요.” (장수동 단장)
“경제 논리로 클래식은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정책과 지원도 수요와 인기가 많은 쪽으로만 이어졌어요. 방탄소년단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전 세계적으로 엄청나게 많지만, 오페라나 가곡, 아프리카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문화는 다양성이 존재해야 하는데, 정책과 교육은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이 아닌 편중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현실인 거죠.” (김흥완 단장)
‘가곡 어벤저스’의 시선엔 변방으로 서서히 밀려난 한국 가곡의 현재에 대한 아쉬움이 짙게 묻어났다. 김은혜 단장은 “MZ세대가 문화의 중심으로 나오며 컨템포러리한 음악의 붐이 일고 현대적 감각이 되살아나는 것은 좋지만, 우리 옛것의 숭고함과 아름다움을 기리는 기회는 사라져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가곡 르네상스’를 향한 걸음은 이제 시작이다. 아직은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음악계에선 정책과 지원,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김흥완 단장은 “음악대학에서조차 가곡은 사라졌다”고 꼬집었다. 중고등학교 음악 시간은 입시에 밀려났다. “가곡을 들어보지도 못한 아이들에게 가곡을 들려주면 외국곡과 뭐가 다르다고 생각할까요. 학창시절 음악시간을 통해 가곡을 접할 수 있는 토양이 마련돼야 하는데, 지금의 교육은 이를 외면하고 있어요.” (정지철 단장) 가곡은 지나온 시대와 역사를 담아낸 ‘시대정신’인 만큼 “국사시간에 음악과 들려주는 방법도 고안할 수 있다”(정지철 단장)는 의견도 나온다.
당연히 더 많은 무대도 필요하다. 설 수 있는 무대 없이 ‘가곡 르네상스’는 이루지 못할 꿈이다. 장수동 단장은 “가곡은 피아노 한 대만 가지고도 멋진 무대를 만들 수 있다”며 “전국 250개 공공극장에서 가곡 무대를 마련하면 운동의 시작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가곡 무대의 강점은 제작비가 적다는 점이기도 하다. ‘한국 가곡 세기의 콘서트’의 한 회당 제작비는 마포문화재단의 다른 기획 공연 대비 30% 정도다.
김자경오페라단은 올해 대관령에서 가곡 페스티벌을 열어 국내외 중창단과 함께 하는 무대를 마련한다. “미국 중창단이 우리말로 가곡을 부를 거예요. 해외에선 방탄소년단 덕분에 우리말에 관심이 높아졌잖아요. 가곡 페스티벌에서도 미국 중창단이 한국 가곡을 우리말로 부를 거예요. 플라시도 도밍고가 ‘그리운 금강산’을 부를 때 웬만한 성악가보다 발음이 정확했어요. 우리말과 노래에 대한 매력을 알릴 기회가 될 거예요.” (정지철 단장)
■ “시대의 트렌드 입고 ‘스타 발굴’ 이어져야”…한국 가곡의 미래와 꿈
가곡의 과거와 현재를 돌아보며 ‘가곡 어벤저스’는 자성의 목소리를 먼저 냈다. 세대가 달라지는 만큼 새로운 흐름을 받아들이는 노력도 필요하다. 장수동 단장은 “가곡의 강점은 다양한 음악을 담아내도 이질감이 없다는 데에 있다”며 “가곡이라는 큰 그릇에 담아 대중음악을 고급화하는 시도도 나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MZ세대를 위한 트렌디한 한국 가곡을 제작”(장수동 단장)하고, “‘미스터트롯’에 나온 성악가 출신 가수 김호중, ‘팬텀싱어’ 출신의 유채훈, 길병민과 같은 스타 발굴”(하만택 대표)도 따라와야 한다.
“MZ세대와 클래식이 익숙한 중장년 세대를 위한 연결고리를 마련해야 해요. 다양한 편성으로 누가 들어도 아름다운 가곡, 찾아서 듣고 싶은 가곡을 선보이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고요. 그러기 위해 트렌드를 분석하는 것이 일순위죠. 트렌드에 따라 대중음악과의 협업 등 다양한 시도를 하되 가곡의 뿌리와 주관을 중심에 두고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김은혜 단장)
비록 지금은 ‘소수의 문화’일지라도, ‘가곡 어벤저스’의 바람은 다시 한 번 찾아올 ‘제2의 가곡 전성기’로 향한다. 정지철 단장은 “문화에 대한 욕망이 봇물처럼 솟아나는 이 때가 가곡을 운동화하기 좋은 시기”라는 생각이다. “지금 우리 시대에 줄 수 있는 가곡의 힘이 있다”(김흥완 단장)고 믿기 때문이다.
“가곡은 나의 감정표현이에요. 정갈하게 옷을 입고, 내가 경험한 시의 언어를 멜로디로 느끼며 공감하는 힘을 가지고 있어요.”(하만택 단장)
“한국 가곡의 큰 힘은 시대공감이에요. 그것은 눈물이기도 하고, 웃음이기도 해요. 자신의 숨겨진 이야기이고요. 지금 우리 시대 사람들을 위로하고, 시대와 소통하는 것에 가곡의 지향점이 있어요.”(장수동 단장)
“오페라와 대중음악을 비교할 때 샴페인, 와인과 콜라 비유를 들곤 해요. 콜라는 마시자마자 맛과 청량감을 느껴 남녀노소 즐기지만, 샴페인과 와인은 처음엔 맛을 느끼기 어렵지만, 경험의 횟수가 늘면 빠지게 돼요. 가곡 역시 토양이 만들어지면, 언젠가는 맛을 느끼게 될 거예요.” (정지철 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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