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최승자는 다섯 권의 시집을 내고 세상을 다 알아버린듯 허무에 빠졌다. 삶도, 사회와 체제· 문명도 다 허망했다. 현실이 아닌 어떤 것, 초월적 세계를 엿보기 시작했다. 1994년 미국 아이오와대 초청으로 넉달간 미국에서 지내면서 점성술을 접한 그는 그렇게 세상 너머를 엿보기 시작했다.
10여년 전 정신분열증을 스스로 고백하며 피폐해진 심신을 대중앞에 드러냈던 최승자 시인의 혼돈의 시작점이랄 미국 아이오와에서의 생활을 담은 일기가 출간됐다.1995년 출간된 산문 '어떤 나무들은-아이오와 일기'의 개정판이다.
26년 만에 새옷을 입고 나온 이 산문집은 아이오와대에서 주최한 인터내셔널 라이팅 프로그램(IWP)에 참가하게 돼 첫 해외여행을 떠난 시인이 1994년 8월26일 일요일부터 1995년 1월16일 월요일까지 대학 기숙사에서 작가들과 보낸 시간을 솔직담백하게 풀어낸 일기형식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간신히 생존하는 메마른 지금의 시인과는 다른 활기와 생기, 유머를 지닌 시인을 만날 수 있다.
파티에도 청바지를 입고 갔던 시인이 원피스를 입어 룸 메이트를 놀라게 하고, 한국 식품가게에서 쌀과 김치, 미역 등을 사며 행복해하는 시인, 파티에서 다른 작가들은 다 나가떨어지는데 지치지 않고 신나게 춤을 추는 시인은 우리에겐 낯선 최승자의 모습이다.
여기서 한 발 나가 시인이 이렇게 재밌는 사람이었나 싶게 웃기기까지 한다. 억지로 웃기는 게 아니라 상황 그대로를 얘기하는데 웃긴다. 가령 한국인들이 대개 그렇듯, 인사하는 게 어색한 시인은 어떤 때는 인사하는 걸 잊어버리고 상대방이 저만치 가버린 뒤에야 ‘아 참 인사를 하지 않았구나’ 생각이 들었다는데, 그 강박이 웃음짓게 한다. 어느날엔 룸메이트 소냐가 외출한 김에 김치를 꺼내놓고 먹고 있는데 소냐가 금세 돌아왔다. 시인은 “김치라는 걸 먹고 있는데, 외국인들은 이 냄새를 못 참아한다는데, 못 참겠어?”고 묻는다. 소냐의 말이 가관이다 “어떤 제국주의적인 돼지 같은 놈들이 그런 말을 하냐”.
산문집은 그저 하루하루의 일과를 기록한 데 그치지 않는다. 시인의 날카로운 통찰이 보석처럼 빛나는 곳들이 많다.
시인에게 어떤 계기가 된듯한 아이오와의 일기는 뒤늦게 도착한 편지처럼 안타까움을 주기도 한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d.com
어떤 나무들은-아이오와 일기/최승자 지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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