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김영상 사회부장]그날, 느낌이 이상했다. 몸이 좋지 않았다. 피곤해 일찍 퇴근을 했다. 샤워를 하고 자리에 누웠을때 핸드폰이 울린다. 고등학교 선배다. 연극부 2년 선배인 그로부터 가끔 안부 전화가 오곤 했다. 졸음이 와서 받지 않으려 했는데, 핸드폰이 끊어지지 않는다. 무슨 일이 있나. 무거운 몸을 다시 일으키며 전화를 받았다.

“오암(五巖) 선생님께서 돌아가셨네. ○○○병원인데 좀 와줘야겠네.”

머리가 띵하다. 묘한 슬픔도 몰려온다. 아무 말도 못하고,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병원에 달려갔더니 선생님의 영정이 눈 앞에 다가온다. 아, 선생님. 눈물이 쏟아진다. 선배와 소줏잔을 기울이며 선생님의 지난날을 얘기하자니 더욱 가슴이 쓰리다. 인생 참으로 무상타.

선생님 애제자 중 애제자인 선배에겐 평소 유언을 남기셨단다. “당신께선 갑자기 쓰러지시면 물과 곡기를 끊으라고 하셨어. 그리고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고, 절대 많이 알리지도 말라셨고.”

실제 선생님은 건강한 상태에서 갑자기 쓰러졌고, 물과 곡기를 받지 않은채 사흘만에 돌아가셨다. “일생의 삶이 깔끔하고 정갈했듯이, 죽음 앞에서도 단정한 모습을 보인 것이지.”

당신은 정말 단아했다. 국어 선생님으로 문학을 사랑했던 당신은 인문학의 중요성을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특성화공고 학생이었던 우리에게 취업과 기술의 필요성도 얘기했지만, 인문학 삶의 소중함을 누누이 강조했다.

선생님은 여유와 멋이 있었다. 당신에겐 ‘흥’이 있었다. 막걸리 한잔에 입에선 시조가 흘러나왔다. 난초 잎을 정성스럽게 닦으면서 노래도 흥얼거렸다. 나같은 ‘공돌이’에겐 희망이었다. 그래서 선생님을 따라 문학을 배우고, 연극에 몰입했다.

당신은 물질주의를 경계했다.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싫어했다. 90세 넘어서까지 전국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고, 그래서 사진전을 제자들이 열어주겠다고 했을때도 폐가 된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인천 앞바다에서 한시간 걸리는 바다에 유골을 뿌려달라고 유언하셨어. 거기선 물이 돌고 돌아 고향까지 닿을 수 있다시며.”

당신이 살면서 아마 마지막까지 놓지 않은 욕심이 있었다면, 바로 고향 개성 근처에 혼이라도 가고 싶다는 것이었으리라.

세월호가 터지고, 한창 심각하게 돌아갈때 “선생님의 지론대로 모든 이들이 물질숭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세월호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계속 맴돌았던 게 사실이다.

20여년전, 주례를 부탁하러 지금의 아내와 댁을 찾았을때 당신은 자신이 직접 찍었다는 엉겅퀴 사진을 선물했다. 수없이 밟히고 베인 자리마다 돋은 가시, 엉켜버린 상처를 보듬는 엉겅퀴처럼 서로 쓰다듬어주면서 살라는 의미였을게다. 그런 선생님을 바쁘다는 이유로, 삶이 치열하다는 이유로 찾아뵙는 게 너무 인색했다.

이제 선생님 흉내를 내려한다. 당신의 삶을 닮으려 한다.

회사가 광화문에서 후암동으로 이사를 왔다. 옛날 살던 빌라와 가깝다. 그땐 젊었으나 욕심이 있었고 가난했다. 아파트 입주 중도금을 내기 위해 전세를 줄이고 줄여 거의 마지막으로 왔던 것이 후암동이다. 빨리 탈출하고 싶은 생각 밖에 없었다. 그래서 후암동의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했다.

지금 역시 가난하지만 욕심은 줄었나보다. 산책을 가거나, 점심을 먹으러 갈때 골목골목 후암동의 멋스러움이 가슴에 전해진다. 옛날에 보던 길은 허름했는데, 지금 보는 길은 참으로 아름답다. 길은 같은데, 달라보이니 이게 인생인가 보다. 선생님의 길을 이제야 어렴풋이 알겠다. 내 인생의 멘토였던 선생님이 벌써부터 그리워진다.

고 김낙봉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