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 前 대사의 ‘일과 삶’
한 때는 ‘남성외교관 못지않네’가 상찬
이젠 여성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현실
일·가정 양립 등 제도개편·조직변화 절실
해외근무 특수성에 대한 공감대도 필요
박은하(58) 전 주영국대사는 여성 외교관 전성시대를 연 선구자로 꼽힌다. 외무고시 최초 여성 수석합격자 타이틀에 이어 역대 네 번째 외교부 본부 내 여성 국장·두 번째 실장급 인사에 발탁되는 등 차근차근 외교부 내 ‘유리천장’을 깨나갔다. 2018년에는 여성 외교관 최초로 영국에 주재하는 대한민국 대사에 임명됐다.
박 전 대사는 자신을 따라다닌 ‘여성 최초’라는 타이틀이 부담스러웠던 적이 많았다고 회상했다.
“여성이 외교관으로 진출한 역사가 짧다보니 저한테 일종의 책임 같은 게 주어질 수밖에 없었어요. 제가 뭘 하든 평가가 개인에게서 끝나는 게 아니었으니까요. 처음에는 부담스러웠는데, 어쩔 수 없이 주어지는 것이라면 즐기자고 생각했어요. 오히려 영광이라고 생각하며 내가 즐기면 나중에 후배들도 그 길을 즐거운 길로 보지 않겠어요?”
하지만 그 과정은 생각보다 험난했다. 박 전 대사는 부임 초기 여성이라는 이유로 업무 능력을 공평하게 평가받지 못했다. “저희 땐 ‘남성 외교관 못지 않다’는 말이 여성 외교관에게 주어지는 칭찬 중 하나였죠. 그때는 그게 최고의 칭찬이었는데, 솔직히 상당히 기분이 좋지 않았어요.”
지난해 외교관 후보자 선발시험 최종 합격자 51명 중 여성은 28명으로 전체의 55%를 차지했다. 외무고시 기준 지난 2000년 30명 중 6명(20%)과 비교해 크게 늘었다. 여성 외교관들이 증가하면서 외교부는 일과 가정의 양립을 위한 제도적 지원부터 수평적인 소통까지 큰 조직변화를 거쳤다.
박 전 대사는 “이제는 여성이든 남성이든 상관없이 좀 더 공평한 평가를 받을 수 있게 된 것 같아요”라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여성 외교관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지난 몇 년 사이 출산·육아 등을 지원하기 위한 근본적인 제도 개편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여성 외교관이 출산·육아휴직으로 자리를 비울 때 대체할 외교 인력을 찾기 어려운 구조 때문이다.
‘외교관 부부 1호’이기도 한 박 전 대사는 외교관 생활을 하면서 두 아들을 직접 키웠다. 박 전 대사는 지난 36년 간 공관 근무를 6차례 하면서 남편인 김원수 전 유엔사무차장과 20년 가까이 떨어져 지냈다. 첫 아들을 낳은 뒤 박 전 대사는 뉴욕, 김 전 차장은 인도 뉴델리, 아들은 박 전 대사의 친정이 있는 부산에서 살면서 한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있는 상황을 경험하기도 했다.
“결혼 후 지금까지 30여 년 동안 남편과 절반의 시간 이상을 떨어져 지냈죠. 업무상 당연할 수 밖에 없는 부분이 많아요.”
하지만 박 전 대사는 육아와 출산을 ‘여성 외교관’의 문제로 바라봐서는 안된다고 지적했다. 박 전 대사는 간부회의를 할 때에도 여성 외교관뿐만 아니라 외교관 모두의 일과 가정 양립을 지원하기 위한 제도정비를 강조해왔다.
“해외 근무가 잦은 업무 특성상 심리적인 부담으로 업무역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어요. 그렇지만 외교관 개개인은 인재로서 하나의 자산이잖아요. 그 자산을 잘 활용할 수 있도록 이제는 시스템이 뒷받침해줘야죠.”
박 전 대사는 육아와 출산은 사회 전체가 짊어져야 하는 문제라고도 강조했다. 그는 “예전에는 개인의 희생을 많이 요구했지만, 이제는 조직과 사회가 해결책을 만들어 나가야죠”라고 말했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결국 가정이 안정돼야 외교관 업무를 잘 수행할 수 있어요. 외교관 직무 특성상 일과 가정이 잘 양립할 수 있도록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이 이뤄졌으면 좋겠어요.” 문재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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