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평 파평윤씨 대언공파
고려때 여진이 점유하던 고토(古土) 9성을 회복한 윤관(?~1111)은 동·서·북 간도가 거란 등 중국족이 아닌 민족에 잠시 점유되었을 뿐 수천년 우리 영토임을 증명하는 위인이다. 나중에 발해의 후예인 여진에 자치권을 주었다.
윤관은 고려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한 뒤 수태보·문하시중 등에 올랐다. 공신에 오르고 영평현(파평) 개국백에 봉해지면서 윤씨의 본관이 이곳으로 정해졌다.
고려 개국공신인 윤신달(893~973)은 파평윤씨의 시조이다. 혜종 때 동경(경주) 대도독으로 부임해 30년간 중책을 맡았는데, 윤관은 윤신달의 5세손이다.
12세 윤계종(?~1346)은 충혜왕비 희비의 아버지로서 충정왕(고려 제30대 왕, 재위 1348~1351)의 외조부이고, 찬성사를 역임했다. 윤보의 둘째아들 윤안적(1269~1319)은 충정왕 때 대언(왕의 비서실장)을 역임하고 대언공파를 열었다.
계유정난 이후에는 사촌매제인 김종서의 죽음을 애도하는 추도문이 원인이 돼 제주에 유배됐고 사면받아 돌아가는 길에 산자수려한 전라도 모평현에 터를 잡아 파평윤씨의 모평 세거가 시작됐다.
22세 윤해(1541~1597)와 신천강씨 부부는 정유재란 때 왜적의 칼에 희생됐는데 신천강씨가 남편을 해치려는 칼날을 두팔로 막아 잘려나가고 결국 부부 모두 처참하게 죽임을 당한다. 이 사실은 조정에 알려졌고, 나중에 열부강씨정려가 내려졌다.
부부의 어린 두 아들 윤성립, 윤정립(1594~1683)은 이 집안 일꾼 도생과 사월에 의해 길러졌다. 종가는 이들의 은덕을 기려 ‘충노비’를 세우고 제사를 지낸다.
24세 윤은로(1612~1686)는 병자호란이 나자 은봉 안방준과 의병을 일으켰다. 효자로 알려진 27세 윤동훈(1716~1770)이 대언공파 윤동훈종가를 열고 대대로 가학의 전통을 잇게 했다.
종가는 윤자화 과거급제 시권과 강서채점지(과목별 점수기록부)를 비롯한 유물들과 학문 탐구와 영농을 병행했던 터전의 귀영재, 도천헌, 수벽사, 영양재 등 고건축물들을 보존하며 선조의 충절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함영훈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