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 제주양씨 학포종가, 누란때 마다 봉기

의인들 키운 학포당, 호국정신 네트워크 산실

실록엔 여성 열사들 포함 가족 9명 순국 적혀

매죽도에 가훈 새겨…구한말~일제에도 거병

[헤럴드경제=함영훈 기자] 양팽손(1488~1545)은 국사책에 두드러지게 부각되지 않았지만, 16세기 이후 우리나라 남부지방 문무겸장 호국리더들을 키운 중심 인물이다. 천재소년 양팽손은 떡잎부터 달랐다. 충의를 가르친 호국의 산실 학포당 기둥엔 그가 7세때 지은 오언절구가 적혀 있다.

학포당. 기둥에 오언절구가 적혀있다. [남도일보, 서정현 선임기자]
학포당. 기둥에 오언절구가 적혀있다. [남도일보, 서정현 선임기자]

천지는 나의 도량이 되고(天地爲吾量), 일월은 나의 밝음이 되니(日月爲吾明), 천지와 일월은(天地與日月), 마땅히 장부의 일이라.(都是丈夫事). 언듯 김종서가 스무살 때 지은 시 ‘호기가’를 연상케 한다.

양팽손은 면앙정 송순(1493~1583)과 함께 송흠선생에게서 배우고, 과거시험은 정암 조광조(1482~1520)와 동기다. 사간원 정언 벼슬을 하다가 기묘사화(1519)로 삭탈관직 당한 뒤 조광조의 시신을 수습해 초가(훗날 죽수서원)에 추모당을 만들고 자신도 죽어서 그곳에 배향된다.

학포는 고려말을 겪었던 선조가 포은 정몽주와 뜻을 같이했던 벗이라서 포은을 배운다는 뜻으로 붙였지만, 그의 아들 대부터 인의예지신,용기,절개,도학을 겸비한 구국의 산실이 된다.

양팽손의 3남 양응정(1519~1581)은 세 번이나 파직된 후 복직하며 공조참판·대사성을 맡았고 낙향해 정철·백광훈·최경장·최경회·신립·박광전 등의 제자를 길렀다.

16세기 이후 호국리더십의 실질적 향도였던 양응정이 학포당에 심은 은행나무
16세기 이후 호국리더십의 실질적 향도였던 양응정이 학포당에 심은 은행나무

을묘왜변 때엔 백세례·양달사·백광훈 등의 제자들이 뜻있는 백성들과 함께 출병했고, 임진왜란 때엔 양산숙(1561~1593)·양산룡 두 아들과 최경회·신립·박광전·안중묵·정운·김덕우·최경운·최경장·최경창 등이 의병 리더로 나섰다.

문무겸장 리더들의 연대는 양응정의 사돈 고경명 부자, 사위 김광운·김두남, 외가의 김인갑·김의갑, 아들 산숙의 동문 조헌·김덕령 등 내로라하는 의병장으로 연결된다.

양팽손-양응정 부자를 재야호국 그룹의 ‘투톱’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쟁쟁한 의병장들의 선배 또는 스승 이자 정신적 지주, 영감(靈感)을 준 향도였음은 분명해 보인다. 기묘사화로 목숨을 잃거나 낙향해 제대로 된 학문을 가르친 기묘명현은 호남 사림의 정신적 거울임을 부인할 수 없다.

안견의 화풍을 익혀 그림에도 능했던 양팽손의 산수도
안견의 화풍을 익혀 그림에도 능했던 양팽손의 산수도

조선왕조실록에도 나온다. 실록에 따르면 양응정의 아들 양산룡이 임진 의병을 일으켜 김천일 장군을 추대했고 군량을 조달했다. 양산숙은 선조에게 밀서를 바치고 돌아와 김천일 부대에 합류해 진주성을 사수했고 김천일·최경회·고종후와 함께 순절했다. 최경회는 논개의 남편이다.

정유재란 때 양산룡 형제가 모친인 박씨부인을 모시고 배를 탔는데 갑자기 왜적선에 맞닥뜨린다. 양응정의 부인 박씨는 “대부의 지어미로서 욕볼 수 없다”며 투신했고 겨우 구조했으나 “뜻이 결정됐거늘 건져내 무엇한단 말이냐” 하면서 다시 물 속으로 뛰어들었고, 효심 깊은 형제도 따라 몸을 던졌다.

양산룡의 처 유씨와 누이들(김광운·김두남의 처 양씨들), 은장도로 자결한 양산숙의 처 이씨 등이 순국한다. 한 집안 9명이 한 자리에서 한결같은 충효·정열을 보인 것은 양응정 집안의 가르침이 몸에 배어있기 때문이라고 조선왕조실록은 기록한다.(양씨삼강문,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1호)

학포종가 종택
학포종가 종택

후손인 구한말 의병장 양한묵(1862~1919)은 3·1독립운동을 이끈 민족대표 33인 중 한사람으로 투옥돼 옥중순국한 독립지사다. 양회일(?~1908)은 을사늑약(1905) 후 화순 쌍산의소(사적 제485호)에서 의병을 일으켜 능주 관아를 점거, 화순으로 진격하다 일본군에 패해 체포·유배되고 다시 거병하다가 투옥돼 옥사했다.

양팽손의 매죽도
양팽손의 매죽도

매죽도는 이 집안 충의의 상징이다. ‘눈속에서 봄을 알리는 매화처럼, 부러질 지언정 절개를 저버리지 않는 대나무처럼 살라’고 가르치고 것이다.

현실정치에 실망하고 재야에서 백년대계를 꿈꾼 양팽손의 심정은 그가 쓴 순수서정시에도 나타난다. 그의 산수도에 적힌 오언절구는 “고깃배여, 함부로 오락가락하지 마소. 세상과의 벽이 트일까 두렵소(漁舟莫來往 恐與世相通)”라고 적었다.

종택의 평화롭고 질박한 풍경
종택의 평화롭고 질박한 풍경

종가는 화순 도곡의 달아실마을에 있다. 도곡에 입향한 것은 양팽손의 아버지 양이하이다. 양팽손이 학포당을 세우자, 아들 양응정이 은행나무를 심었는데, 5백살된 2021년에도 듬직하고 푸른 기상을 뽐낸다.

주지하다시피 제주양씨는 삼성혈 세 별 중 한 신인(神人) 양을나이다. 682년 중시조 양순이 신라에 들어가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낸 후 제주를 지칭하는 한라군(漢拏君)에 봉해지면서 본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