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언제부터 지루해했을까?/고쿠분 고이치로 지음, 최재혁 옮김/한권의 책

[헤럴드경제=이형석 기자] “뭐 좀 재미있는 일 없어?”

아마 사람들이 달고 사는 말 중의 하나가 아닐까? 그렇다면 이 질문의 바탕에는 “나는 지금 재미가 없다”는 속뜻이 숨어 있을텐데,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가할 틈조차 없이 살고 있지 않은가? 학생들은 공부하느라, 젊은 세대는 취업 준비하느라, 직장인들은 일하랴, 노부모들은 돈벌랴 손주봐주랴 바쁘니 말이다. 그런데도 때때로 인생이 지루하다는 느낌이 엄습한다. 그래서 피곤한 눈을 비비면서도 휴대폰과 컴퓨터를 끼고 살고, 퇴근하면 술집에서 목을 축이고, 틈만 나면 대형마트를 다니고, 주말이면 들로, 산으로, 공원으로, 극장으로 걸음을 재촉한다. “쉬고 싶다, 피곤하다!”를 입에 달고 살면서도 정작 시간만 비면 채우지 못해 안달이다.

그렇게 시간표를 메우며 살아도 인생은 늘 심심하고 재미없고 공허하다. 시국을 한탄하고 재해를 걱정하고 불의의 희생자들을 안타까와 하고 흉악사건을 끔찍해하지만 오늘도 “화끈한 소식”을 찾아 인터넷을 서핑한다. 마음의 허기를 달래려 인터넷 쇼핑몰을 들락날락하고 장바구니에 잔뜩 담아 택배를 받지만, 기분 좋은 것도 잠깐 뿐이다. 인터넷을 들여다보면 살 것이 왜 이리 많은지. 클릭을 마구 하다가 퍼뜩 정신이 들면, “물건을 사기 위해 쇼핑하는 건지, 쇼핑하기 위해 물건을 사는 건지” 헷갈린다.

일본의 젊은 철학자 고쿠분 고이치로(다카사키경제대 준교수)라면 아마도 “나는 지루하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했을 지도 모른다.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이라는 부제를 단 그의 저서 “인간은 언제부터 지루해했을까”는 ‘지루함’을 현대인들의 존재 조건이자, 철학의 근본 물음으로 삼고 이를 성찰한 책이다.

저자는 “‘음식과 집을 얻을 수 있는 수입’과 ‘일상의 신체활동이 가능할 만큼의 건강’을 갖추고 있는 사람들을 엄습하는 일상적 불행”이라고 버트런드 러셀이 지적한 현대인의 역설로부터 출발한다. 즉 “인류가 지향한 풍요로움이 달성되면 인간은 거꾸로 불행해진다는 것”이 현대인이 당면한 역설적인 상황이라는 것이다. 이는 경제학자 존 갤브레이스가 말한 공급이 수요를 창출하는 상황이며,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지적한 바, 문화산업이 소비자의 감성 자체를 ‘생산’하는 상황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사회주의자 윌리엄 모리스는 “혁명으로 얻은 자유와 한가함을 어떻게 장식할 것인가” 물었고, 알렌카 주판치치라는 철학자는 목숨을 건 행위에만 사람들이 흥분과 자극을 받는다는 요지의 주장을 폈다.

‘지루함’에 대한 가장 인상적인 표현은 파스칼로부터 나왔는데, 그는 “인간의 불행은 누구라도 방에 꼼짝 않고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생겨난다”고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몰두하고 열중할 것”을 찾고 이를 통해 ‘기분 전환’을 추구한다. 그러나 몰두할 것이 과연 ‘욕망의 대상’이고 ‘욕망의 원인’일까. 저자는 이런 예를 든다. 토끼 사냥에 나서는 사람에게 토끼를 가져다주면 기꺼이 사냥을 포기할까? 도박하는 이에게 도박으로 딸만한 돈을 미리 주면 그는 도박을 멈출까? 아니다. ‘욕망의 대상’(토끼, 돈)이 ‘욕망의 원인’(사냥, 도박, 즉 기분전환)과 다르기 때문이다.

저자에 따르면 지루함으로부터의 탈피, 즉 기분전환을 추구하는 인간은 흥분을 원하며, 그 자극은 괴로움과 부담을 감수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2차 대전 파시즘의 광풍이 저자가 말하는 대표적인 사례다.

그렇다면 인류는 원래부터 지루함을 안고 사는 존재였을까? 저자는 ‘지루함’의 기원을 역사적ㆍ논리적으로 따진다. ‘지루함’은 수백만년에 걸친 인류사에서 비교적 최근인 1만년전에야 나타난 현상이다. 이리 저리 떠돌며 유목생활을 하던 인류는 지루할 틈이 없었다. 옮겨간 낯선 지역에서 끊임없이 정보를 탐색하고 신호를 해석하며 위험과 위협을 극복하며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후와 생태계의 변화로 정착을 강요받은 인류는 청소와 쓰레기ㆍ배설물처리 등의 반복 생활을 익혀야 했고, 유목생활에서는 필요없었을 금기와 규율을 생성ㆍ수용해야 했으며, 물품의 저장과 교환으로 인한 불평등을 감수해야 했다. 결정적으로 ‘지루함을 피할 필요성’이 제기된 것이다. 저자는 이른바 신석기혁명이나 정착혁명, 농경혁명이 노동생산성의 비약적 증가를 통해 인간 생활의 극적인 발전을 가져왔다는 서구 사회과학의 정착중심주의를 반박한다. 이 점에서는 최근 번역된 ‘석기 시대 경제학’의 마셜 살린스의 논지와 궤를 같이한다. ‘정착혁명’에 이어 ‘지루함’에 또다른 결정적 계기는 포드주의로 대표되는 근대화 이후의 노동 형태와 근로자의 여가까지 지배하고 상품화하는 소비사회이다. 저자는 헤겔부터 루소, 홉스, 마르크스, 한나 아렌트 등의 ‘소외론’을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하이데거의 ‘지루함’에 관한 이론에 집중한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지루함의 형식’들을 제시한 뒤, 이를 세세히 소개하고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긴 길을 돌아, 저자가 이르는 결론은 “지루함과 공존하는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대답이다. 첫째는 스피노자가 말하는 반성적 사유, 즉 한가함과 지루함에 대한 자각이다. 두번째는 사치스러움의 회복이다. 세번째는 즐기는 것의 훈련이다. 한마디로 다시 말해 “즐기는 것을 알고, 사고하게 되고, 기다릴 수 있는 것”이며 다른 말로는 기호나 브랜드가 아닌 먹고 마시고 입는 것 자체를 즐기는 것, 문화와 오락 예술을 누리면서 훈련과 사유를 거듭하는 것이다.

이러한 논지는 서로 다른 방향에서 한 자리에 도달한 다른 철학자들의 사유와 통한다. 파스칼은 “인간의 모든 불행은 단 한 가지, 고요한 방에 들어앉아 휴식할 줄 모른다는 데서 비롯한다”고 했고, ‘피로사회’의 한병철 교수는 ‘사색적 삶’에 ‘활동적 삶’의 자리를 내주라고 했으며, 발터 벤야민은 이를 ‘깊은 심심함’이라고 했다.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의 저자 피에르 쌍소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한가로이 거닐기. 다른 이의 말과 다른 소리들을 듣기. 권태에 빠지기. 꿈꾸기. 기다리기. 마음의 고향을 떠올리기. 글쓰기. 포도주에 빠져보기 등을 권유했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 깊은 사색에 빠질 수 있는 시간, 게으르게 웃고 먹고 마시고 즐길 권리를 스스로에게 허하라는 것이다. 신이 허락한 제 7일째의 안식,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을 돌려주라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쿠분 고이치로 교수는 “지루함과 마주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된 인간은 필시 자신이 아니라 타인과 관련해서도 사고할 수 있게 된다”며 이는 필시 “어떻게 하면 모두가 한가해질 것인가? 모두에게 한가로움을 허락하는 사회는 어떻게 가능할까?”에 대한 질문을 불러온다고 했다. 전쟁, 기아, 빈곤, 불평등, 자연재해, 노동착취로 인해 ‘한가함’이 허락되지 않는 이들을 위한 공동의 노력이야말로 저자가 말하는 한가함과 지루함에 관한 최후의 ‘윤리학’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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