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 경주정씨
경주가 본관인 정지년(1395~1462년)은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이 쿠데타를 일으킬 때 성균관 관직중 정4품 문예강의를 맡는 사예였다. 단종이 존경하던 할아버지 세종대왕 재위시절 성삼문, 하위지와 함께 과거에 급제해 임관했던 그는 단종이 물러나자 그도 퇴거에 노송정에서 학문 연구에 몰두하면서 스스로를 ‘망칠옹(望七翁)’이라고 했다. 육현(六賢:생육신)에 하나를 더한다는 뜻인데 자신을 낮춰 칠옹이라 한 것이다.
후에 좌찬성에 증직되고, 계림군에 봉해졌으며, 순천 옥계서원, 남원 덕암서원, 공주 숙모전에 배향됐다. 노송정을 둘러싼 이야기를 담은 노송실기(老松實紀)를 남겼다.
종가에 따르면, 정지년은 신라 개국의 주역으로 알려진 시조로부터 50세손이다. 51세 정효종(1434~1497)은 문과 급제하여 승정원 좌승지, 예조참의, 오위장에 올랐고 좌리공신에 녹훈됐으며 참의공파를 열었다.
참의공의 3세인 정내(1491~1548)는 남원에서 태어나 계모의 구박을 피해 순천에 입향했다. 부자인 왕씨 가문에 장가들어 훗날 재산 상속을 받는다. 4세인 옥계 정승복(1520~1580)은 무과에 급제하고 옥구현감을 지냈으며, 을묘왜변(1555), 기미왜변(1559)에서 공을 세웠다.
정승복의 아들들은 용감했다. 정사익은 학문에 조예가 깊고 김굉필을 추모하는 경현당 중수에 앞장섰고, 정사준은 이순신의 군관으로 조총을 제작하는 등의 공으로 선무원종공신 3등에 녹훈됐다. 정사횡은 임진왜란에 활약하고 정유재란에는 수백석 군량미를 모아 이순신 휘하에 들어가 노량해전에 공을 세웠으며, 정사립은 이순신 휘하에서 조정에 올릴 장계를 작성하는 최측근 군관이었다.
6세 정빈(1566~1640)은 숙부 정사횡과 사촌 정선과 함께 조정의 식량 고갈 소식을 듣고 의병군과 군량미 천석을 모아 뱃길로 의주 행재소까지 운반했던 공으로 선무원종공신 2등에 녹훈되고, 낭천·아산 등의 현감을 역임했으며 옥계서원에 배향됐다.
담장, 정원, 계곡의 정취가 고즈넉한 종가는 교지, 분재기 등 고문서를 보존하고 있다. 4m 길이의 분재기는 9세 정태주(1647~1728)가 기록한 것으로, 문중재산과 종통재산을 구분했다.
옥계서원에서는 순천향교 유림들이 매년 추모제를 올릴 때 생식으로 제수로 올린다. 종가의 접빈음식으로는 닭죽, 한과, 식혜가 있다. 함영훈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