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비보이 1.5세대…라스트포원 수장
세계 대회 석권한 ‘비보이 전설’
도당굿으로 한 판 살풀이…경계 넘나든 협업
태동기와 함께 온 황금기…빨리 사라진 관심
2024년 파리 올림픽 종목 채택 ‘다시 온 기회’
“춤을 가르치는 리더에서 비전 제시하는 리더로”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문화 대통령’의 등장은 ‘소년의 꿈’을 키웠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데뷔 무대를 넋 놓고 봤어요.” 댄서 출신 가수들은 있었지만, 서태지와 아이들은 ‘힙합의 시초’였다고 그는 돌아봤다. “간주에서 윈드밀과 헤드스핀을 하더라고요. 이주노 선배는 진짜 비보이였어요.” ‘비보이(B-boy)’라는 용어도 없던 시절, 고난도의 기교를 부리는 그 춤에 빠져들었다. 2002년 결성된 라스트포원을 이끄는 조성국(38)은 ‘1세대 이주노’의 뒤를 잇는 비보이 1.5세대다.
비보이의 ‘B’의 약자이기도 한 브레이킹(breaking)은 뉴욕의 뒷골목에서 태어난 춤이다. 힙합 음악의 브레이크 비트에 맞춰 춤을 추는 것은 사전적 의미. 인종간의 갈등, 세력간의 다툼이 잦아들지 않던 1970년대 미국, 힙합을 추며 서로를 공격하지 않기로 한 암묵적 평화조약과도 같은 춤이라는 것이 ‘브레이킹’에 담긴 남다른 역사다.
조성국 대표는 한국 비보잉과 오랜 세월을 함께 했다. 국내에서 비보이의 삶이 순탄했을 리 없다. 어른들의 입에선 절로 혀를 차는 소리가 나왔다. 소위 ‘노는 애들’의 또래 문화로 치부됐다. 춤을 배울 만한 학원도, 뒤따라갈 선배도 없어 각자도생이 필수였다. 시선과 편견의 벽을 넘어 전 세계를 석권하며 전성기를 이끌었고, 춤의 영역을 넘어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그러다 하나둘 동료와 선후배가 떠나가는 아쉬움도 목격하니, 어느덧 20여년이 흘렀다. 조성국 대표에게 비보잉은 여전히 ‘깨지 않는 꿈’이다. 국악과 접목한 브레이크 댄스로 새로운 무대를 준비 중인 조 대표를 최근 서울마포음악창작소에서 만났다.
조 대표에게 ‘경계’를 넘나드는 협업은 그리 낯설지 않다. 유튜브가 태동하기 전, 이미 동영상 업계를 강타한 영상 하나가 있었다. 가야금으로 연주하는 캐논 변주곡에 맞춘 비보잉 광고. 당시 이 광고로 비보잉과 국악의 접목을 처음 시도한 것이 바로 조 대표였다. “‘가야금 캐논 변주곡’ 이후로 다양한 크로스오버 형태의 비보잉을 시도하고 실험하게 됐어요.” 그는 또 한 번의 이색 무대를 준비 중이다. 마포문화재단의 국악M페스티벌 ‘꼬레아 리듬터치’의 ‘밤섬 부군당 도당굿 오마주’ 무대(3월 30일 유튜브·네이버TV 공개)다.
“비보잉은 형식적으로 정해지지 않아 다른 장르와도 잘 어우러져요. 국악과의 접목은 누구도 할 수 없는 한국 비보이만의 콘텐츠라고 생각해요.” 3분간의 무대에선 모든 것을 쏟아낸다. 신을 부르는 무속인처럼 비보이는 그들 스스로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존재로 선다. “우리가 무속인이 돼 신내림을 받는 것처럼 굿판을 벌여요. 짜여진 각본 없이 추는 즉흥이 비보잉의 매력인 만큼 도당굿과도 잘 어우러질 것 같아요.”
조 대표가 브레이킹에 입문한 것은 1998년. 피플크루가 낸 힙합 댄스 비디오를 보며 춤을 배웠다. 당시 대한민국엔 유일무이한 ‘비보잉 교재’였다고 한다. “그 때엔 청소년들이 즐길 만한 문화가 없었어요. 지금처럼 게임이 대중화되지도 않았고, 피씨방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요. 저마다의 스트레스를 풀 데가 없었는데, 비보이의 춤 동작이 너무나 신선하고 멋있더라고요. 유행을 선도하는 느낌이었어요.”
전주에 살던 그는 매주 혜화역 마로니에 공원을 찾았다. 이곳은 90년대 후반 비보이들의 성지였다. 전주와 서울을 오가며 브레이크 댄스에 눈 떴고, 하루에 9시간씩 춤을 추며 ‘최고의 춤꾼’으로 기량을 다듬었다. 비보이의 실력은 경쟁 속에서 일취월장한다. 상대방의 기를 죽이기 위해 온갖 동작으로 고난도 기술을 선보이며 ‘배틀’을 벌이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기술 하나를 익혀서 빨리 학교에 가서 자랑하곤 했어요. 제일 처음 시도해본 건 ‘동키즈’였어요. 당나귀처럼 물구나무를 서는 기술이에요. 비보잉은 ‘내가 이 동작을 해냈다’는 성취감이 커요. 물론 몇 주 후엔 모두가 하고 있지만요. (웃음)”
한국의 비보이가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 것은 국제 무대에서 활약하면서다. “2003년 일본 오사카에서 열리는 국제 대회에 사비로 배를 타고 출전했던 것이 처음이었어요.” 그 뒤로 라스트포원은 2005년 독일 배틀오브더이어 우승, 2007년 영국 에딘버러 캐슬락 배틀 우승, 2011년 프랑스 운베스티 배틀 우승 등 브레이크 댄스로 전 세계를 제패했다. 라스트포원뿐 아니라 진조크루, 갬블러 등 한국 비보이 그룹이 2000년대 초반 전 세계를 말 그대로 ‘씹어먹었다’. 그러면서 국내엔 “비보이는 한국이 세계 1등”이라는 인식이 생겼고, 기업의 후원도 붙었다. 비보이가 대중의 관심을 받은 것도 그 무렵이다. TV에선 비보이가 기인처럼 소개됐고, ‘비보이를 사랑한 발레리나’라는 공연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비보이를 향한 관심은 너무 짧았다. 그는 “비보이의 황금기는 너무 빨리 왔다 너무 빨리 식었다”고 말했다. 태동기와 함께 찾아온 황금기는 불과 10년. 많은 팀에 위기가 왔다. 2010년 이후 K팝 이 대중음악 시장을 장악하고, 경연 프로그램의 영향으로 ‘힙합=랩’이라는 공식이 만들어지면 브레이킹은 ‘지나간 유행’처럼 여겨졌다. 한국 비보이들은 모든 지원과 후원에서 배제됐다. 현실적 어려움은 턱밑까지 왔다. “3, 4개월 수입이 없던 때도 있었어요. 춤으로 돈을 벌 수 있는 모든 걸 했어요. 인형을 쓰고 춤을 추기도 했고, 지금은 내레이터 모델이 하는 일을 제가 하기도 했죠. 모두가 같은 상황이었어요. 동료들이 현실적 이유로 떠나갔고, 잡지 못했어요.”
지금은 브레이킹 문화에 중요한 시기라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3년 뒤 파리 올림픽에서 브레이크 댄스가 정식 종목(‘브레이킹’)으로 채택되기 때문이다. ‘딴따라’로 치부됐던 춤꾼들이 태극마크를 달고 다시 한 번 세계 무대에서 도약하게 된다. 이미 ‘효자 종목’으로 불리며 브레이킹을 향한 관심이 높아졌다. 우리나라 비보이, 비걸에겐 ‘마지막 기회’라는 절박함도 따라온다. “다시 기회가 왔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세계 1등이라는 기대가 높은 만큼 준비를 착실히 해야겠죠.” 문화체육관광부, 전국 춤 관련 협회가 힘을 모았고, 대한브레이킹경기연맹(KBF)이 결성돼 2024년을 기약하고 있다. 조 대표도 연맹의 이사직을 맡고 있다. 성공적인 올림픽을 위해 지역에서도 배출할 수 있는 후진 양성에도 힘쓰고 있다.
긴 시간을 돌고 돌아 마주 한 조 대표의 얼굴엔 지난 20여년의 희노애락이 그려졌다. 그 안엔 식지 않는 열정과 브레이킹에 대한 애정, 해내야 한다는 집념이 담겼다. “20대엔 일등을 하고 싶었고, 성취감에 춤을 췄어요. 하지만 일등을 한다고 춤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더라고요. 30대가 되며 춤으로도 먹고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이기에, 그는 이정표가 되기를 자처했다. 이번 도당굿 무대가 각별한 것도 그 때문이다. 고난도 기술만이 브레이크 댄스라 생각하는 편견을 내려놓고, 역동적인 기술과 즉흥으로 한국 비보이만의 강점을 녹였다. 쉴 틈 없이 내달리는 3분의 무대가 그에겐 또 한 번의 살풀이와 다름 없다. “춤을 가르쳐주는 리더로 시작해 비전을 보여주는 리더가 돼야 하는데, 제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누군가의 미래가 달라질 수 있다는 압박과 부담이 늘 따라왔어요. 후배들에게 끊임없이 비전을 제시하는 리더가 돼주고 싶어요. 동시에 브레이킹은 나이와 무관하게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 목표예요. 외국에선 아빠와 아들이 비보잉을 하고, 배가 나온 50대가 헤드스핀을 돌아요. 저도 60세까지 비보잉을 하려고 해요.” 1.5세대 비보이의 눈이 다시 한 번 빛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