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제의 본질로 돌아가자. 어떤 접근이 위안부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가.

‘외교’는 왜 해결책이 될 수 없었나. 답은 지난 30년간 발전한 위안부 담론을 추적하면 찾을 수 있다.

본 기자는 그 답을 함께 찾기 위해 이번 기획기사를 준비했다.

운동·외교현안·연구분야·국제 여성 인권문제로서 위안부 담론이 발전한 과정을 파헤치고자 한다.

[헤럴드경제=문재연 기자] 외교는 국가와 국가, 정부와 국민, 양국의 국민 간의 끊임없는 소통과 협상을 거쳐 형성된 관계나 조약을 모두 포괄한다. 2010년대 한·일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관통하는 주제는 다음과 같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법적 책임과 배상.’

애초 정치 혹은 외교 중심의 위안부 문제 해결을 추구했던 정부는 2011년 피해자 개인의 배상청구권이 소멸하지 않았다는 헌법재판소의 주문 이후 일본으로부터 ‘법적 책임과 배상’을 끌어내는 데에 집중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와 피해자들은 처음부터 요구한 조건이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와 자국 지지자들은 한·일 청구권 협정에서 배상 문제는 해결됐다며, 법적 배상과 책임 인정은 불가능하다는 논리였다.(2007년 4월 일본 최고재판소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틀 안에서 일본 정부나 기업이 강제징용 노동자를 자발적으로 구제하라고 한 판결은 위안부 문제와 관련이 없다는 게 현 아베 정부와 보수세력의 주장이다.)

[일본군 위안부 e-역사자료관 제공]
[일본군 위안부 e-역사자료관 제공]

▶정치적 해결 모색한 정부와 시민단체의 불협화음=어느 순간부터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모든 것은 ‘법적 책임 인정과 배상’으로 귀결되고 있다. 우리 정부가 처음부터 법적 배상을 요구한 것은 아니다. 김영삼 정부와 김대중 정부는 금전적 배상을 요구하지 않는 대신, 일본에 진상조사와 역사교육을 요구했다. 피해자 지원은 정부가 할 테니, 전쟁범죄에 대한 실태와 반성 그리고 후세대로 이어지는 교육은 가해국인 일본의 의무라고 선을 그은 것이다.

문제는 정부가 왜 이 같은 ‘정치적 해결’을 도모했는지 피해자와 시민단체에 설명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고노 담화 이후 1994년 일본 총리에 취임한 무라야마 도이치는 아시아여성기금을 통해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위로금을 지급하겠다고 밝혔다. 한국 정부는 처음에 “당사자들의 요구가 어느 정도 반영된, 성의 있는 조치”라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시민단체는 강력 반발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와 소속 피해자들은 연일 비난 성명을 발표했고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 인정 ▷책임자 처벌 ▷정부 배상 등을 반영한 ‘7대 해결책’을 요구했다.

‘일본과의 미래지향적 관계’를 모색한 김대중 정부는 김영삼 정부와 마찬가지로 일본 정부에 금전적 보상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방침하에 위안부 피해자들을 자체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법안을 마련했다. 하지만 시민단체가 요구하는 7대 해결책에 대해 소극적인 자세로 임하거나 소극적으로 임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다.

▶위안부 해결 위한 법적 근거 마련한 노무현 정부와 일본의 우경화=시민단체의 목소리를 수용한 노무현 정부는 한·일 회담 문서 전면을 공개하고 “위안부 문제가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해결됐다고 볼 수 없다”고 발표했다. 위안부 피해자 109명은 정부의 해석에 힘입어 헌법소원을 제기했고, 2011년 헌법재판소는 ‘피해자의 배상청구권이 소멸되지 않았으며, 외교부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청구권을 위해 일본과 협상을 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다.

문제는 일본의 우경화였다. 가뜩이나 한·일 청구권 협정을 한국과 달리 해석했던 일본은, 법적 해석을 달리하는 한국에 깊은 불신과 ‘혐오’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잃어버린 10년’ 등 깊은 디플레이션의 늪에 빠진 일본 대중은 빠른 속도로 우경화했다. 1997년 무라야마 담화를 향해 “한 사과를 왜 또 하느냐”며 비난 수위를 높였던 일본 보수정치집단인 ‘일본회의’가 세를 다지는 단계에 들어가 있었고, 이로 인해 극우 성향의 인터넷집단을 지칭하는 ‘넷우익’과 이른바 ‘혐한’ 세력이 생겨났다.

일본회의 등에 힘입어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재집권하고(2007년 건강상 문제로 1년 만에 사임했었다) 보수 강경 드라이브를 대외정책 공약으로 내세웠다. 요시다 세이지 오보 사태에 대한 공론화 작업과 고노 담화 재검토 작업 모두 아베정권이 들어서면서 이뤄졌다.

결국 우경화한 일본과 이명박 정부는 합의가 이뤄질 수 없다고 판단하고 협상을 중단했다.

▶정부와 시민단체의 이해관계, 그리고 깨진 한·일 관계=2015년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가 발표된 지 얼마 안 가 ‘최악의 외교 결과’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시민단체는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 대중도 반발했다. 합의에는 일본의 법적 책임도, 배상도 분명하게 명시하지 않았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박근혜 대통령은 그 누구보다 ‘법적 책임 인정과 배상’을 고수했던 지도자 중 한 명이다. 박 대통령은 일본이 ‘적절한 배상과 사과’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한·일 양자회담과 한·미·일 3자 정상회담을 거부하는 등 이른바 ‘원트랙 외교’를 고집했다. 이 같은 전략은 일본을 회유할 ‘레버리지’가 되지 못했다.

그리고 ‘미국’이라는 대외 변수가 터졌다. 한·미·일 3각 연대를 중시한 미국은 일본에 ‘사과 표명’을, 한국에는 ‘합의 타결’을 촉구했다. 정부가 한·미·일 안보 협력과 위안부 문제를 저울질한 책임이 컸다.

[사진=연합뉴스]
[사진=연합뉴스]

문제는 일본과의 본격적인 협상 과정에서 박근혜 대통령과 청와대 참모진은 ‘국가와 국가 간 협상’에 공들이는 만큼 ‘국가와 국민 간 소통’에 공들이지 않으면서 터졌다. 박근혜 정부가 정대협과 우호적인 관계를 띤 것도 아니었다. 박근혜 정부는 ‘정부 중심의 문제 해결’을 고수했다. 여성가족부를 중심으로 정대협과 나눔의집, 시민단체에 소속되지 않은 위안부 피해자들과 ‘서면 협의’를 진행해 정대협과 다소 소원한 관계를 형성했다. 그사이 법적 책임과 배상 개념을 애매하게 남긴 ‘2015년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가 이뤄졌고, 박 대통령이 그토록 강조한 ‘일본의 법적 책임 인정과 사과’가 부재한 것을 깨달은 정대협과 피해자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문재인 정부는 대선에서 ‘2015년 위안부 합의 파기’를 약속했다. 정대협과 정부의 관계는 어느 때보다도 좋았다. 정대협 소속 활동가들은 노무현 정부 들어 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해 어느덧 더불어민주당의 전신인 새천년민주당·민주통합당과 연대하며 활동을 벌였다.

그리고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 및 국민과의 ‘소통’ 과정에서 다시 문제가 발생했다. ‘위안부 합의 파기’는 외교 합의를 깨트리는 것을 의미했다. 일본 사회가 계속 우경화한 점을 감안하면 ‘재협상’은 현실 가능한 옵션이 아니었다. 일본의 진보세력 혹은 대중여론을 움직이고, 양성하기 위한 전략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결국 정부는 ‘합의를 유지하되, 일본에 추가적인 진심 어린 조치를 촉구한다’는 애매한 입장을 취했다.

그렇게 한국 정부는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지난 30년간 대외정책을 펼치는 과정에서 일본 정부와 피해자 및 시민단체, 일본 국민과의 소통 균형점을 찾지 못한 채 방황을 계속했다. 그렇게 위안부 문제는 또다시 ‘해결’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