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퇴임하는 권순일 대법관 후임 후보군이 30명으로 압축됐다. 여전히 현직 판사가 대다수인 가운데, 변호사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등 비법관 인사도 7명이 이름을 올렸다. 여성은 3명이었다.
대법관 인선 때마다 나오는 지적이 있다. 흔히 말하는 ‘서오남(서울대 출신 50대 남성 법관)’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특정 사건의 결론을 정확히 내는 것보다, 입법자가 미처 정하지 못한 우리 사회의 방향을 설정하는 기능이 훨씬 중요한 곳이다. 통상임금의 범위는 어디까지인지, 양심적 병역 거부를 계속 처벌할 것인지와 같은 우리 생활과 밀접한 판단이 대법원에서 내려진다. 특정 직업군에 치우친 대법관 구성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하지만 그동안 ‘서오남’이 아닌 대법관들이라고 해서 기존 시각에서 벗어난 좋은 판결을 많이 내렸는가 하면 꼭 그렇지는 않다. 반대로 서울대를 나온 50대 남성 판사 출신 대법관이 보수적인 판결을 한 것도 아니다.
권 대법관은 유능한 판사들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엘리트였다. 고등학교 졸업 후 3년 만에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대법원의 ‘브레인’ 역할을 하는 선임재판연구관과 수석재판연구관을 거쳤고,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을 맡으며 사법행정 경험도 갖췄다. 임명 당시 전형적인 ‘서오남’이었던 권 대법관은 오히려 진보적이라고 평가받는 판결을 여럿 남겼다. 성폭력 피해자의 진술을 함부로 배척해서는 안 된다는 ‘성인지 감수성’을 강조한 판결이나, 이주 노동자에게도 노동 3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 역시 권 대법관이 주심이었다.
대법원은 연간 4만건 이상의 사건을 처리하는 ‘판결 공장’이 돼서는 안 된다. 대법원은 개별 사건을 처리하는 곳이 아니라, 일선 법원에서 적용할 법리를 만드는 곳이다. 환자를 일일이 촉진하고 치료하는 의료원이 1, 2심이라면 대법원은 대학병원 역할을 해야 한다. 한 전직 대법관은 “대학병원이 감기환자를 치료하기 바쁘면 치료법을 개발할 수 없다”고 했다. 대법원의 중심은 사회적으로 중요한 사건을 다루는 전원합의체가 돼야 한다.
하지만 지금처럼 사건을 털어내기 바쁜 상황에서는, 수많은 미제사건을 정해진 기한에 처리해본 경험을 갖춘 판사나 재판연구관으로 일해 본 판사 출신 대법관이 두각을 나타낼 수밖에 없다. 대법관 임명제청권자인 대법원장은 밀려드는 3심 사건을 그저 외면할 수는 없다. 대법원에 수많은 재판연구관이 보고서를 써내는 것도 대법관 12명만으로는 연간 4만건 이상의 상고심을 판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난해 대법원에 접수된 상고심 본안사건은 4만7979건에 달한다. 대부분 상고심 사건은 대법관 4명으로 구성되는 소부에서 심리한다. 대법원에는 3개의 소부가 있다. 산술적으로 따지면 대법관 1인당 1년에 3900건 이상 사건을 처리하는 셈이다. 이러한 구조가 정상적이지 않다는 데에는 법조인 대다수가 동의한다. 다만 해법에서는 차이가 있다. 일정한 요건을 갖춘 사건만 대법원 판단을 받도록 하자는 의견과, 대법관 수를 늘려 부담을 덜게 하자는 안이 대립한다. 어느 쪽이건 대안을 찾아야 한다. 단순히 대법관 후보 거론할 때마다 ‘서오남이냐 아니냐’ 따지는 것만으로는 좋은 판결을 하는 대법원을 만들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