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안함에 이르렀는가?” 최근 종영한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마지막 회에서 중년의 남자주인공은 이제 청춘의 여자주인공에게 그렇게 화두 같은 질문을 던진다. 사실 그 장면만을 떼놓고 보면 조금은 뜬금없는 대사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드라마에서 이 두 인물이 겪은 일들을 떠올려보면 그 대사는 굉장히 의미심장하다. 그들은 지독할 정도로 힘겨운 현실의 터널을 통과했다. 중년 남자는 아내의 외도를 겪었고 회사 내에서 퇴출과 승진 사이에 벌어진 정치싸움에 휘말렸으며, 청춘 여자는 빚쟁이에 몰리고 부양해야할 할머니까지 있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생존하려 안간힘을 써왔다. 그 지독한 상처와 불행을 겪고 나서 겨우 그들은 제 자리로 돌아온다. 그런 의미에서의 ‘편안함’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라고 이 드라마는 말한다.
그러고 보면 <슬기로운 감빵생활> 같은 드라마도 이런 ‘편안함’의 행복을 중요한 가치로 다뤘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이 드라마는 우리가 사는 현실을 ‘감방’ 생활에 비유한다. 그래서 프로야구 선수로서 잘 나가던 주인공이 어쩌다 감방 생활이라는 밑바닥으로 추락하게 되는 이야기를 통해, 그 현실을 어떻게 ‘슬기롭게’ 헤쳐 나갈 것인가를 묻는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 역시 엄청난 성장이나 성공을 꿈꾸지 않는다. 그저 더 이상의 불행이 없는 ‘편안함’이 궁극의 목표가 된다.
드라마는 판타지를 담고 그 판타지에는 현실에 대한 갈증이 들어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 갈증을 들여다보면 당대의 대중들이 갖고 있는 욕망이 보인다. 그런 점에서 이 드라마가 말하는 ‘편안함’을 생각해보면 흥미롭다. 2003년 방영됐던 <대장금> 같은 드라마가 성장과 신분상승에 대한 대중들의 열망을 담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지금, 드라마는 더 이상 섣부른 성장과 신분상승을 판타지로 담지 않는다. 이렇게 된 건 이미 ‘금수저 흙수저’로 등장했던 이른바 ‘수저계급론’에 담겨져 있듯이 더 이상 노력에 의해 성장할 수 있는 사다리가 끊겨진 사회와 무관하지 않다.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이 노력해서 신분상승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이야기에 몰입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개천에서 더 이상 용이 나오지 못하는 사회에서 더 이상 행복은 사회적 성취로 추구되지 않는다. 대신 대중들은 이제 ‘개인적인 행복’을 추구한다. 직장 생활에서 갖은 곤욕을 치르며 버티는 이들은 이제 집으로 돌아와 자신만의 생활 터전 속에 지극히 개인적이지만 확실한 행복을 느끼려고 한다. 이른바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나 ‘욜로’ ‘미니멀 라이프’, ‘스몰 럭셔리’ 같은 이 시대의 트렌드들은 모두 이 행복을 더 이상 사회에서 얻을 수 없는 사회가 만들어낸 행복의 대안들인 셈이다.
그 행복의 대안들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 역시 TV만 켜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도전을 통한 성장스토리를 담았던 <무한도전>이 종영을 하고, 대신 <삼시세끼>나 <숲속의 작은 집> 같은 소소하고 편안한 개인적 행복을 담는 예능들이 등장하게 된 건 우연이 아니다.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편안함이 행복이 된 사회’에 들어오게 되었다. 도전을 통해 성공을 거두는 서사로부터 벗어나 ‘편안함’에 이르게 되는 순간만이 진정 추구할 수 있는 행복이 된 사회. 지금 우리 사회에 확산되어 가는 그 ‘편안함’을 추구하는 트렌드를 정서적으로 공감하면서도 한편으로 씁쓸함을 지울 수 없는 건 그래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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