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 서울 이문동 · 휘경동 일대 고시원 7곳 점검해보니
화재시 거듭되는 대형 인명사고…관련 법·제도 정비해도 시늉만 완강기 · 소화전 장애물로 사용불능…아예 소방시설 갖추지 않은 곳도
#지난 2008년 7월25일, 경기도 용인시의 한 고시원에서 전기합선으로 화재가 발생했다. 불길이 일자 68개의 벌집 같은 고시원 내부는 순식간에 검은 연기로 가득찼다. 이 불로 현장을 빠져나오지 못한 7명이 숨지고 6명이 부상을 입었다.
# 같은 해 10월20일, 서울 강남구 논현동의 한 고시원에서도 불길이 일었다. 이 고시원에 거주하던 A 씨는 고시원에 불을 낸 뒤 불길을 피해 뛰어나온 피해자들을 무참히 찔러 살해하고 중상을 입혔다. 사망자는 6명, 부상자는 7명에 달했다.
이처럼 ‘고시원 화재=대형 인명사고’라는 등식이 성립될 정도로 고시원 화재 사고는 많은 인명 피해를 낳았다. 그때마다 고시원의 다닥다닥 붙은 방들과 미로 같은 통로, 허술한 소방시설 등 불안 요소를 개선하기 위해 관련 법과 제도들이 재정비됐다.
정부는 고시원 화재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 하기 위해 고시원 복도 폭을 90㎝에서 120㎝ 이상으로 확대하고 간이 스프링쿨러 및 야광 피난유도선 설치를 의무화하는 ‘다중이용업소 안전관리 특별법 시행규칙 개정안’을 시행했다. 하지만 이는 신규 시설에만 적용될 뿐 법 적용 이전 시설은 여전히 화재 위험에 노출돼 있다.
29일 헤럴드경제가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과 휘경동 일대 고시원 7곳을 점검한 결과 대부분 소방시설이 노후하고 부식된 채 방치돼 있었다. 아예 소방시설을 갖추지 않은 곳도 눈에 띄었다. 고시원이 여전히 안전 사각지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휘경동의 E고시원. 요즘 E고시원은 대학가 주변에 홍보 전단지를 배포하는 등 손님 끌어모으기에 한창이다. 전단지 내용 중 눈에 들어온 것은 ‘소방시설 완비’라는 문구였다
하지만 기자가 직접 확인한 고시원 내부는 안전과는 거리가 멀었다. 화재 시 대피할 수 있는 비상구가 복도 끝에 마련돼 있고 문도 개방돼 있었지만 완강기 시설은 보이지 않았다. 완강기는 고층 건물에서 화재 시 지상으로 안전하게 내려올 수 있도록 하는 중요 소방시설이다.
현행법상 3층 이상 10층 이하의 숙박시설 및 다중이용업소는 완강기를 반드시 설치해야 한다. E고시원의 경우 비상문에는 분명 ‘완강기’라는 글자가 써 있었지만 완강기가 있어야 할 자리를 빨래 건조대가 차지하고 있었다.
이문동의 H고시원은 상황이 더 심각했다. 3층 주방에는 소화전이 설치돼 있었지만 그 앞을 대형 냉장고가 가로막고 있었다. 화재 발생 시 소방호스를 꺼내야 하는데 냉장고 때문에 소화전 문을 열기조차 어려운 상황이었다.
소화기 점검 상태도 불량했다. 안전고리가 빠진 채 방치된 소화기가 있는가 하면, 점검 일자가 지난 2006년 11월1일에 ‘멈춘 소화기’도 발견됐다. 고시원 7곳 모두 점검주기표를 단 소화기는 단 한 대도 볼 수 없었다. 이처럼 열악한 소방시설 탓에 고시원 거주자들은 언제나 불안감을 안고 살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경제적 비용이 부담스러워 고시원 생활을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한다.
E고시원에서 9개월 째 거주하고 있다는 일용직 노동자 B 씨는 “안전에 민감한 사람은 여기 못 산다. 그런 사람은 차라리 돈 더 내고 넓은 원룸에서나 살아야지…”라고 했다. 또 다른 거주자 C 씨 역시 “돈만 있으면 더 나은 데로 가고 싶다. 그나마 고시텔이 싸니까 여기서 위험 감수하며 살 수 밖에 없다”며 한숨을 쉬었다.
김현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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