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레이서 권리 확보 2년 만에 조기 승인
중간 기술이전 탈피…현지 직판으로 마진 회수
4분기 공급 돌입…간암 병용도 보완 작업 박차
[헤럴드경제=최은지 기자] 국내 바이오 기업 HLB가 해외 유망 바이오텍의 신약 후보물질을 들여와 미국 현지 자회사를 통해 식품의약국(FDA) 허가와 상업화까지 완주하는 새로운 글로벌 비즈니스 모델을 선보였다.
HLB의 미국 자회사 엘레바 테라퓨틱스(이하 엘레바)는 23일(현지시간) 섬유아세포성장인자수용체2(FGFR2) 표적 항암제 ‘리픽투(성분명 리라푸그라티닙)’가 FGFR2 융합 또는 재배열을 동반한 국소진행성·전이성 담관암 성인 환자의 2차 치료제로 미국 FDA 품목허가를 획득했다고 밝혔다.
기초물질 기술수출도, 20년 자체 개발도 아니다…‘물질 도입·완주’ 하이브리드
이번 성과는 국내 바이오 업계가 오랜 기간 답습해 온 전형적인 사업화 경로의 한계를 극복할 새로운 대안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동안 국내 제약·바이오 기업의 글로벌 신약 도전은 크게 두 가지 극단적인 선택지에 머물렀다. 연구실에서 발굴한 초기 물질을 전임상이나 임상 1상 단계에서 글로벌 빅파마에 조기 기술이전(라이선스 아웃)하고 마일스톤과 로열티를 챙기거나, 반대로 국내 본사가 10~20년에 걸쳐 막대한 자본과 실패 리스크를 홀로 감내하며 임상 전 과정을 밀고 나가는 방식이었다.
조기 기술이전은 리스크를 덜지만 약가가 가장 높은 미국 시장 판매 수익의 10% 안팎만 로열티로 거둬들이는 한계가 있고, 독자 완주는 시간과 비용의 벽이 지나치게 높았다.
HLB는 이 두 방식의 맹점을 파고들었다. 이미 임상 1/2상 단계에서 효능 가능성이 검증된 해외 유망 파이프라인을 선별해 사들인(라이선스 인) 뒤, 미국 규제 환경과 네트워크에 정통한 현지 법인을 통해 허가와 직판을 끝까지 책임지는 하이브리드 모델을 택했다.
리픽투의 원개발사는 미국의 정밀 표적항암제 전문 바이오텍인 릴레이 테라퓨틱스(Relay Therapeutics)다. 릴레이 테라퓨틱스가 독자적인 단백질 동역학 플랫폼을 기반으로 발굴·설계해 ‘RLY-4008’이라는 코드명으로 초기 임상을 진행하던 물질을, 엘레바가 2024년 12월 전 세계 독점 라이선스 계약을 통해 전격 확보했다.
이후 엘레바는 기존 글로벌 임상 데이터를 체계적으로 재분석하고 허가 전략을 독자적으로 수립해, 인수한 지 2년도 채 되지 않아 미국 FDA 신약허가신청(NDA) 승인을 이끌어냈다. 10년 이상 걸리는 초기 발굴 기간을 건너뛰고, 가장 중요한 규제 문턱을 현지화 전략으로 넘은 셈이다.
희귀암 니치마켓 조준…높은 표적 선택성으로 오프타깃 부작용 낮춰
리픽투가 주력 표적으로 삼는 담관암은 간에서 분비된 담즙이 십이지장으로 흐르는 통로에 생기는 희귀암이다. 초기 징후가 없어 진단이 늦고, 수술 후에도 재발률이 높아 전 세계적으로 미충족 의료 수요가 매우 높다. 미국암학회(ACS)에 따르면 미국 내에서만 매년 약 8000명의 신규 환자가 보고된다.
리픽투는 FGFR2 변이를 정밀하게 차단하는 비가역적 경구용 표적항암제다. 기존에 승인됐던 범(Pan)-FGFR 저해제들이 FGFR1·3·4 등 다른 수용체까지 무차별 억제해 고인산혈증이나 손발톱 박리, 안구 건조 등 심각한 오프타깃(비표적) 독성을 유발했던 것과 달리, FGFR2에만 선택적으로 강하게 결합하도록 설계됐다.
허가의 기반이 된 글로벌 1/2상 ‘리포커스(ReFocus)’ 임상시험에서 뛰어난 치료 효과가 확인됐다. 이전에 전신 화학요법을 받은 FGFR2 융합·재배열 담관암 환자군에서 객관적반응률(ORR) 45.7%, 반응지속기간 중앙값(mDOR) 11.8개월을 나타냈다. 질병 진행 없이 생존한 무진행생존기간 중앙값(mPFS)은 11.3개월(95% CI, 9.2~14.8)에 달했고, 12개월 무진행생존율(PFS)은 50%에 육박하는 49.2%를 기록했다. 안전성 프로파일 역시 용량 조절을 통해 충분히 관리 가능한 수준으로 입증됐다.
임상 연구에 참여한 세계적 암 전문 기관인 미국 메모리얼 슬론 케터링 암센터(MSKCC)의 앨리슨 슈람 종양내과 전문의는 “리픽투는 지속적인 치료 반응과 관리 가능한 안전성 프로파일을 보여주며 FGFR2 융합 양성 담관암 환자들에게 새로운 치료 기회를 열었다”면서 “적절한 환자 선별을 위해 진단 초기부터 분자 유전자 검사를 적극 시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4분기 美 직판 체제 가동…유럽 진출·고형암 바스켓 임상 확장
엘레바는 구축된 자체 영업망을 활용해 올해 4분기 내에 리픽투를 미국 전역에 직접 출시할 방침이다. 빅파마를 거치지 않고 미국 현지 자회사가 유통을 전담하는 직판 구조는 미국 내 높은 약가 마진을 자회사와 한국 본사가 그대로 흡수할 수 있어, 향후 핵심 캐시카우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기대된다.
글로벌 영토 확장도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엘레바는 이달 14일 유럽의약품청(EMA)에 리픽투의 담관암 품목허가신청(MAA)을 접수해 공식 심사에 들어갔다. 여기에 FGFR2 변이가 나타나는 유방암, 위암 등 다양한 암종을 포괄하는 암종불문 바스켓 임상인 ‘리포커스202(ReFocus202)’를 병행해 적응증 외연을 대폭 넓힐 계획이다.
김동건 엘레바 대표는 “치료 선택지가 제한적이었던 담관암 환자와 가족들에게 확실한 2차 치료 옵션을 제공할 수 있게 됐다”며 “의료진과 환자들에게 약물이 신속히 닿을 수 있도록 상업화 공급망을 철저히 가동하겠다”고 말했다.
간암 3차례 CRL 넘어설까…‘재도전’ 준비
리픽투의 이번 FDA 허가는 HLB가 약 20년간 공들여온 항암 신약 사업에서 거둔 첫 번째 규제당국 통과 결실이라는 점에서 기업 차원의 상징성이 크다.
HLB의 간판 파이프라인이자 블록버스터를 겨냥한 간암 1차 치료제 ‘리보세라닙+캄렐리주맙’ 병용요법은 제조품질관리(CMC)와 생산시설 실사 이슈로 미국 FDA로부터 세 차례 보완요구서한(CRL)을 수령하며 문턱에서 멈춰 섰다.
HLB는 최근 원료공장 관련 지적 사항이 자발적 개선 권고(VAI) 수준으로 해소되는 등 핵심 걸림돌이 풀렸다고 보고, 항서제약과 함께 최종 보완 서류를 갖춰 조만간 신약허가 재신청(Re-submission)에 돌입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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