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행정허가 우선 추진… 음성적 불법유통 차단 착수
의료계 출혈 위험 경고…진료선택권 법제화 요구
모자보건법 수술 한정…국회 대체입법 마련 시급
[헤럴드경제=최은지 기자] 정부가 임신중지 약물(이른바 ‘미프진’)의 내년 1분기 국내 도입을 공식화하며 제도권 편입에 속도를 내고 있지만, 7년째 방치된 입법 공백 탓에 실제 현장에 안착하기까지 풀어야 할 법적·의학적 난제가 산적해 있다.
단순히 약물의 찬반 문제를 넘어 법 개정 없는 행정 허가의 적법성 논란부터 원내 복용 강제 여부, 의사의 진료선택권, 건강보험 급여화, 배우자 동의 조항 정비까지 구조적 쟁점들이 얽혀 있어 국회의 대체입법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식약처 허가만으론 한계…‘행정적 월권’ 논란 직면
정부가 약물 허가에 전격 착수한 배경에는 암시장 형태로 퍼진 불법 약물로부터 여성 건강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현실적 절박함이 깔려 있다.
원민경 성평등가족부 장관은 22일 라디오 인터뷰에서 “약물이 허용되지 않아 불법 유통된 가짜 약 복용이나 오남용으로 여성 건강에 심각한 침해가 발생해 더는 주저할 수 없었다”며 “태아와 여성의 건강, 자기결정권 모두 중요한 기본권인 만큼 건강보험 급여 적용을 적극 검토해 안전한 공공의료 체계로 편입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첫 단추인 ‘식약처 단독 품목허가’부터 법적 논란에 직면해 있다. 현행 모자보건법 제2조는 인공임신중절을 여전히 ‘수술’로만 규정하고 있다. 이 때문에 국회가 법을 고쳐 ‘약물 또는 수술 등 의학적 방법’으로 개정하지 않은 채 행정부가 약사법 허가만으로 새로운 방식을 추가하는 것은 현행법의 규율 구조를 사실상 행정적으로 변경하는 월권이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반면 법제처와 정부는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으로 형법상 처벌 규정이 실효됐고 약사법상 허가를 금지할 명시적 조항이 없는 만큼, 안전성·유효성 심사를 거친 품목허가 자체는 국회 법 개정 전이라도 가능하다며 맞서고 있다.
“알약 복용 단순화 안 돼”…의료계, 진료선택권·보호 요구
투약 장소와 복용 방식을 둘러싼 안전성 공방도 뜨겁다. 세계보건기구(WHO) 등 국제 기준은 일정 조건에서 가정 복용 등 자가관리를 인정하는 추세지만, 국내 의료계는 부작용 위험을 들어 ‘의료기관 내 직접 처방·조제 및 의료진 관리하 투약’을 절대적 전제로 요구하고 있다.
직선제 대한산부인과개원의사회는 성명을 통해 “미프진을 부작용이 적고 간편하게 복용하는 약으로 단순화해서는 안 된다”며 “미국 FDA 임상시험에서도 병용 환자의 85%가 이상반응을 겪고, 헤모글로빈이 2g/dL 이상 떨어지는 중증 출혈(5.5%)과 수술적 자궁 내용물 제거가 필요한 불완전 유산(약 1%) 위험이 상존한다”고 경고했다.
특히 “초음파로 자궁외임신을 사전에 배제하지 못하면 난관 파열로 복강 내 대량 출혈이 발생해 급성 사망에 이를 수 있다”며 “국가가 명확한 기준 없이 ‘의사 재량’이라는 이름으로 위험과 법적 책임을 현장 의료진과 환자에게 떠넘겨선 안 된다”고 못 박았다.
의료인의 양심에 따른 ‘진료선택권(거부권)’과 사법적 보호장치 역시 핵심 뇌관이다. 종교적·윤리적 신념에 따라 약물 처방을 원치 않는 의사의 선택권을 법률로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 의료계의 일관된 요구다.
대한산부인과학회와 대한산부인과의사회, 직선제개원의사회 등 산부인과 3개 단체는 공동 입장문에서 음성 유통 차단을 위한 국가 관리 체계 도입에는 공감하면서도 제도적 정비를 선결 과제로 못 박았다.
이들은 “개인의 신념에 따라 처방에 참여하지 않을 의사의 진료선택권을 존중하되 필요한 진료로 신속히 연계되는 절차가 법률에 명확히 담겨야 한다”며 “형법 개정이 완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처방과 투약에 참여하는 의료진이 형사적 불확실성에 놓이지 않도록 안전관리 체계와 보상 방안, 의료인 보호 규정이 함께 작동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반면 원 장관은 “헌법불합치 취지상 의사 처벌 우려는 거의 없으며, 진료가 어려울 땐 타 기관으로 전원하면 된다”고 밝혀 현장과의 시각차를 드러냈다.
‘수술’에 갇힌 모자보건법…건보 급여·대체입법이 최대 관건
치료 접근성을 좌우할 건강보험 급여 적용 여부와 함께, 사전 상담·숙려제도 및 ‘배우자 동의’ 조항 정비도 주요 과제다.
비급여로 출시될 경우 비싼 약값 탓에 취약계층이 다시 온라인 불법 약물로 밀려날 수 있어 건보 적용이 필수적이지만, 복지부는 제약사의 급여 신청과 사회적 합의를 지켜봐야 한다는 신중한 기류다.
아울러 현행 모자보건법 제14조에 남아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제약하는 ‘배우자 동의’ 요건은 현실과 맞지 않아 폐지가 시급하며, 사전 상담·숙려제 역시 신중한 결정을 돕는 장치라는 견해와 시술 시기를 부당하게 지연시키는 행정적 장벽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팽팽히 맞서고 있다.
국회입법조사처 역시 최근 보고서를 통해 “식약처의 품목허가는 안전성과 유효성이 입증된 사용에 대한 허가일 뿐, 임신중지의 법적 허용 주수와 사유, 절차 등을 대체할 수 없다”고 짚었다.
보고서는 “의약품 품목허가가 특정 임신중지 방법의 적법성을 결정하는 처분이 아닌 만큼, 입법 공백을 이유로 품목허가를 제한할 수는 없지만 임신중지의 규율 체계는 입법적으로 명확히 정비해야 한다”며 모자보건법과 형법 등 국회의 대체입법 병행을 강조했다.
결국 약물 도입 발표는 7년간 멈춰 있던 임신중지 제도화의 시작점일 뿐이다. 행정적 약물 허가에만 기댈 것이 아니라 여성의 온전한 건강권 보장과 의료진이 안심하고 진료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기 위해 국회가 모자보건법과 형법 개정 등 입법적 책무를 서둘러 이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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