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청 “개청 간첩법 시행·방첩사 폐지로 업무 가중”
[헤럴드경제=김아린 기자] “미우나 고우나 안보수사는 이제 경찰밖에 안 남았습니다”
한 안보경찰은 달라진 안보수사 지형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안보 수사를 위한 각종 제도의 급격한 변화에 따른 결과다. 지난 8월 국군방첩사령부 해체 과정에서 방첩사가 맡아온 군사기밀보호법 위반 등 사건 일부가 경찰로 이관됐다. 앞서 2024년 1월 국가정보원의 대공수사권이 폐지되면서 경찰이 대공수사를 전담하고, 국정원은 수사에 필요한 정보만 지원하는 체계로 바뀌었다. 지난 13일에는 외국 정부나 정보기관을 위해 국가기밀을 탐지·수집하는 행위 등을 처벌하는 개정 간첩죄(형법 제98조의2)가 시행됐다. 1953년 형법 제정 이후 73년 만에 간첩죄의 적용 대상이 ‘적국’에서 ‘외국 및 이에 준하는 단체’로 확대된 것이다. 기존 간첩죄를 적용하기 어려웠던 외국을 위한 간첩행위도 처벌할 수 있게 됐는데, 관련 수사 부담은 경찰에 집중될 전망이다.
대공·방첩에 더해 경제안보범죄 수사도 늘어날 전망이다. 경찰은 기업의 이익을 위한 기술유출범죄에는 기존처럼 산업기술보호법 등을 적용하되, 외국 정부가 관여한 사건에는 개정 간첩죄를 적용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경찰의 기술유출범죄 단속 건수는 지난해 179건으로 지난 2021년 89건에서 5년 사이 두 배 이상 늘었다.
경찰청은 이처럼 개정 간첩죄 시행과 방첩사 해체가 맞물리면서 안보수사 업무가 늘어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경찰청은 22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윤건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제출한 답변서에서 “기존에는 방첩사가 군 관련 범죄에 연루된 민간인을 수사할 수 있었지만, 관련 사무를 이관받은 국방부 조사본부의 수사 대상은 군인과 군무원으로 제한된다”며 “이를 고려할 때 개정 간첩법 시행 이후 경찰의 안보수사 업무가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유명무실’하던 간첩죄 개정
수사주체는 사실상 경찰뿐
대통령령인 ‘방첩업무 규정’은 국가정보원과 경찰청, 해양경찰청, 법무부, 관세청, 지식재산처, 국방방첩본부 등을 방첩기관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 가운데 현재 외국 간첩사건을 직접 수사할 상시 조직은 사실상 경찰뿐이다.
국정원은 ‘국가방첩 최고 심의기구’이지만 지난 2024년 1월부로 대공수사권이 박탈돼 조사권만 남아있는 상태다. 이에 경찰에 첩보를 지원하는 역할에 그치고 있다. 올해 8월 방첩사가 해체된 자리에 신설된 국방방첩본부 역시 군 관련 방첩정보활동만을 담당하며 수사는 국방부 조사본부가 따로 맡는다. 해경과 관세청, 법무부는 해양·관세·출입국 등 각 기관의 관할 범위 안에서 제한적인 수사권만 행사한다.
오는 10월 출범하는 중대범죄수사청의 수사 범위에도 국가보호범죄에 해당하는 간첩죄가 포함된다. 군인과 군무원이 연루된 간첩사건은 국방부 조사본부도 수사할 수 있다. 하지만 두 기관이 외국 간첩수사 수요를 감당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또한 중수청은 올해 처음 출범하는 신설 조직인 만큼 조직을 안정시키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 있다. 한 전직 안보경찰은 “중수청이 출범 직후부터 외국 정보기관이 개입한 고도의 간첩사건을 수사할 역량을 갖출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고 했다.
국방부 조사본부는 외국에 포섭돼 군사기밀을 빼돌린 군인은 수사할 수 있지만 함께 연루된 민간인은 직접 수사하기 어렵다. 이에 따라 군 관련 간첩 사건에서도 민간인 수사는 경찰이 담당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국정원의 대공수사권 폐지 이후 경찰이 유일한 대공수사기관이 된 데 이어 개정 간첩죄 시행으로 외국의 간첩활동까지 경찰이 수사할 몫이 된 것이다.
경찰, ‘안보수사 최후 보루’됐지만
예산 제자리걸음에 숙련자 태부족
경찰청이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경찰은 개정 간첩죄 시행 등에 따른 업무 증가에 대응하고자 안보수사 역량 강화 예산으로 올해보다 10억4400만원이 늘어난 446억8200만원을 내년도 예산안에 요구했다. 증액 요구 항목에는 기술유출 신고 포상금과 안보수사용 채증 소모품, 자료유출방지시스템 구축 비용 등이 포함됐다. 다만 요구안이 전액 반영되더라도 지난해 예산 442억원을 4억원가량 웃도는 수준에 그친다. 올해 줄어든 예산을 사실상 지난해 수준으로 회복하는 정도인 셈이다.
경찰은 수시직제 요구안에 방첩수사 인력 25명 증원 계획도 담았다. 증원 인력은 주한 외국공관과 군사기지, 주요 기업·연구소가 밀집해 있거나 등록 외국인이 많아 방첩 수요가 클 것으로 예상되는 시도경찰청에 우선 배치할 계획이다. 이와 별도로 산업기술 유출 수사를 담당할 안보수사 인력 44명의 증원도 요청했다.
하지만 대공·산업기술·테러·방첩 등의 수사를 담당하는 안보경찰은 대공수사권이 경찰로 전면 이관된 2024년 이후 3년 연속 정원 미달 상태다. 올해 6월 기준 안보경찰 현원은 2265명으로 정원 2315명보다 50명 부족했다. 2024년의 2285명과 비교하면 오히려 20명 줄었다. 할 일은 늘었지만 인력은 2년 전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마저도 심사를 거쳐야 해 실제 증원·증액 여부는 불투명하다. 한 경찰 관계자는 “올해 민생사건 대응이 부각되면서 인력을 일반 수사부서로 돌리고 있는 만큼 안보수사 인력까지 추가로 확보할 여력이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일만 넘어오고 지원은 그대로”
그동안 형법 제98조는 ‘적국을 위하여 간첩하거나 적국의 간첩을 방조한 자’를 처벌하도록 규정했다. 그러나 북한은 헌법에 따라 국가가 아닌 반국가단체로 판단하기 때문에 북한 관련 간첩사건은 국가보안법 제4조를 중심으로 처리돼왔다. 이외 중국과 러시아 등 외국에 의한 간첩행위는 군사기밀보호법이나 외교상 기밀누설죄 등 개별 법률을 적용해야 했다. 이들 법률의 구성 요건에 해당하지 않으면 국가기밀이나 국가핵심기술 유출이 발생해도 처벌할 수 없었다.
이에 간첩죄 적용 대상 확대는 안보기관들의 오랜 숙원이었다. 국정원은 지난 2월 국회 개정 간첩죄 통과 이후 낸 성명에서 “간첩법 개정으로 고도화된 외국 등의 간첩 행위로부터 국가안보와 국익을 수호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이 마련된 데 대해 환영한다”며 “첩보 수집부터 수사기관의 사법처리까지 총력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경찰 내부에서는 국정원에 이어 방첩사까지 다른 기관이 맡아온 수사를 넘겨받았지만 그에 상응하는 지원은 뒤따르지 않고 있다는 불만이 나온다. 한 경찰 관계자는 “이제 수사를 하지 않는 기관들의 일만 경찰로 넘어오고 예산과 인프라는 따라오지 않고 있다”며 “경찰은 부족한 여건 속에서 필요한 자원을 자체적으로 마련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한탄했다.
이어 “외국 스파이를 처벌할 길은 열렸지만 현재 구조상 결국 경찰의 역할과 책임이 커질 수밖에 없다”며 “미우나 고우나 경찰이 잘 할 수 있도록 그만큼 지원도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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