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부, 신기술 도입과 근로조건 변화 구분
배치전환·근무시간·안전대책까지 교섭 대상
현대차 노사도 신기술 정보 공유·공동 대응 합의
계획 수립 중에도 교섭 가능…정보 공개 시점 관건
[헤럴드경제=김용훈 기자] 정부가 인공지능(AI)과 자동화 설비 도입 자체에 반대하는 요구를 의무적 교섭 대상에서 제외했다. 다만 도입에 따른 직무·근무형태 변화가 객관적으로 예상되면 관련 사항은 교섭하도록 했다.
감원이 없더라도 교대제나 작업방식이 달라진다면 노사가 논의해야 한다는 취지다. 기업이 어떤 기술을 선택하느냐와 그 기술이 노동자의 일자리를 어떻게 바꾸느냐를 구분한 것이다.
3일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경영성과급 등 노동쟁의 대상 시행지침’은 AI·자동화 설비 등 신기술 도입 결정 자체를 의무적 교섭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고 명시했다. 로봇 도입이나 스마트팩토리 구축을 발표했더라도 업무가 바뀌거나 고용이 줄어들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 교섭 의무가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설명이다.
반면 신기술 도입에 따른 직무·근무형태 변경이나 정리해고 등에 관한 구체적인 인력운영계획이 수립 중이거나 결정된 사실이 확인되면 관련 근로조건은 교섭 대상이 될 수 있다. 지침은 구조조정에 따른 배치전환과 고용안정대책, 근무시간 조정, 작업방식 변경에 따른 안전보건 대책 등을 교섭 대상으로 제시했다.
주목할 대목은 교섭 기준을 인력 감축 여부에만 두지 않았다는 점이다. 지침은 생산 공정에 피지컬 로봇을 투입하면서 교대제 등 근무형태를 바꾸는 경우를 구체적인 사례로 들었다. 고용을 유지하더라도 노동자가 맡는 업무와 일하는 시간이 달라지는 계획이 확인되면 관련 교섭이 가능하다는 의미다.
가령 로봇 투입으로 기존 작업자를 다른 공정에 배치하거나 교대조 운영을 바꾸는 구체적인 계획이 확인됐다면 배치전환의 기준과 절차, 근무시간 등을 논의할 수 있다. 사람이 로봇과 함께 일하도록 작업방식이 바뀌는 경우에는 그에 따른 안전보건 대책도 교섭 의제가 될 수 있다. 이를 모두 신기술 도입에 관한 경영상 결정이라는 이유로 교섭에서 제외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권창준 노동부 차관은 AI 도입으로 직무가 없어지거나 인력이 조정된다면 교섭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배치전환에 대해서도 “되느냐 안 되느냐가 아니라 기준과 절차를 논의하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적용 범위는 생산직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노동부는 AI가 사무직의 반복 업무를 줄이거나 업무 효율을 높이는 데도 활용되는 만큼 AI 도입을 곧바로 고용 축소와 연결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다만 사무직 역시 구체적인 직무나 근무형태 변경이 예상된다면 관련 근로조건을 따져야 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기준이 적용된다.
자동차 산업에서는 로봇 도입과 고용의 관계가 이미 노사 의제로 떠올랐다. 현대차그룹은 올해 초 미국 조지아주 공장인 현대차그룹 메타플랜트 아메리카(HMGMA)에 2028년부터 휴머노이드 로봇 ‘아틀라스’를 투입하고, 부품 분류 등에서 시작해 적용 공정을 확대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현대차 노사는 최근 임금교섭에서 피지컬 AI·로보틱스 등 미래 기술 도입의 필요성에 공감하면서 신사업·신기술 진행 상황을 공유하고 산업 전환에 공동 대응하기로 합의했다. 기술 도입과 관련한 정보 공유를 노사 합의에 담은 것이다. 지난달 25일 마련된 잠정합의안은 같은 달 31일 조합원 찬반투표를 통과했다.
이번 지침이 이런 자율적인 논의를 막는 것은 아니다. 노동부는 의무적 교섭 대상이 아닌 사항도 노사가 자율적으로 교섭하고 합의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기존에 신기술 도입과 관련한 협의 절차 등을 약속했다면 지침 발표만으로 그 합의가 무효가 되는 것도 아니다. 법이 교섭을 의무화하는 범위와 노사가 합의로 정한 절차는 구분해야 한다.
남는 쟁점은 교섭을 언제 시작할 수 있느냐다. 지침은 인력운영계획이 최종 확정돼야만 교섭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아니다.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 중이라는 사실이 사내 공지나 노사협의회 자료, 교섭 과정의 사용자 확인 등을 통해 드러나고 근로조건 변동이 객관적으로 예상되면 관련 교섭이 가능하다.
권 차관은 “확정해서 발표돼야 교섭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확인되면 교섭된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AI 도입에 따른 인력 변동이 있는지를 노사가 확인하고, 변동이 없다면 이를 단체협약에 담는 방식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설명도 내놨다.
그러나 기술과 인력운영에 관한 정보가 기업에 집중된 상황에서 노조가 계획의 구체화 여부를 얼마나 일찍 확인할 수 있을지는 과제다. 기업은 AI 도입 효과를 검증하는 단계라 인력 배치가 정해지지 않았다고 볼 수 있고, 노조는 공정이나 업무의 자동화 범위가 정해졌다면 직무 변화도 충분히 예상된다고 판단할 수 있다.
정보 공유가 늦어지면 교섭을 시작할 때 이미 설비와 업무체계의 큰 틀이 정해져 있을 수 있다. 반대로 기술 도입 검토만으로 감원이나 근로조건 악화를 단정하기도 어렵다. 정부가 제시한 ‘막연한 가능성’과 ‘객관적으로 예상되는 변화’ 사이의 경계를 실제 사업장에서 어떻게 확인할지가 중요해지는 이유다.
결국 AI를 둘러싼 노사 협상의 대상은 일자리 수만이 아니다. 누가 어떤 업무를 맡고, 얼마 동안 일하며, 달라진 작업환경에서 어떻게 안전을 확보할지도 포함된다. 신기술 도입 결정과 근로조건 변화를 구분하는 기준이 현장에서 작동하려면, 기업의 도입 계획과 노동자의 업무 변화에 관한 정보를 언제 공유하고 교섭을 시작할지도 함께 정리돼야 한다.
fact0514@heraldcorp.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