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밥 말이야.
- 밥이 어때서?
- 우리한테 주어진 이 소중한 밥말이지. 우리, 허락받고 먹어야 한다고 생각해. 주목사.
7년 동안 별 탈 없이 지내던 김목사가 어느 날 내게 이런 주제를 가지고 왔다. 김목사와 나는 특별한 관계였다. 일단 동갑이란 점이 특별했고, 감리교, 장로교, 이렇게 대형 교단이 즐비한 가운데 상대적으로 작은 소수 교단 출신이란 점도 특별했다. 목사 안수를 받은 시점도 동일했고, 둘 다 성장과는 관계없는 작은 교회를 운영한다는 점도 특별했다.
이후, 우리 둘의 길은 달라졌다. 김목사는 ‘목사는 오직 목사라는 성직에만 매달려야 한다’며 은근히 작가 일을 병행하는 나를 비난하는 듯한 말을 선언하듯 던진 뒤, 그는 이른바 신도 수가 스무 명이 되지 않는 초소형 교회를 16년 동안 운영했고, 나도 나름 글 쓰는 일로 돈벌이하며, 그와 엇비슷한 초소형 교회를 16년 동안 운영했다.
인생도, 성직의 길도 무류(無類)했다. 종교, 그중에도 기독교인 교회는 AI(인공지능)가 창궐하고 각종 인문학 프로그램이 늘어나면서 분명한 내리막을 감당해야 했다. 김목사와 나는, 불경스럽지만, 교회를 계속 운영해야 하는지, 문을 닫아야 하는지, 문을 닫는다면 뭘 해 먹고 살아야 하는지, 앞으로의 인생을 서글프지 않게 그 리듬을 끌어올릴 수 있는 길은 무엇인지 생존을 향한 고민을 해야 했다. 그런 중차대한 대목에서 김목사가 한 말, 밥을 먹을 때 허락받고 먹어야 한다고 말한 건, 참으로 그 타이밍은 절묘했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밥에 관한 이야기를 했던 그 장소는 김목사와 내가 만나 제법 허기가 졌을 이른 저녁, 식당에서였다. 제법 먹음직스러운 돌솥밥을 앞에 두고, 식사 기도를 하는 종교적 절차마저 생략한 채 꺼낸 김목사의 밥에 관한 명상을 듣기에 이르렀다. 이 경우 작가인 ‘나’의 촉은 제법 영민하게 움직이기 마련이다. 그래도 16년이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16년 정도, 비록 작은 교회라고 해도 목회하며 얻은 종교적 내공이 있을 거라는 게 내 주관이었으므로.
하지만, 이후 이어지는 밥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다른 양상을 품고 내게 나타났다. 대화의 첫 번째 단락을 여과 없이 이어보면 다음과 같다.
- 주 목사 그거 알아?
- 뭘?
- 우리가 삼시 세끼를 먹는 건 말이야. 대단히 숭고하다는 사실 말이야.
- 세끼를 챙겨 먹는 게 숭고하기까지 하다고?
- 우리의 몸이 하루하루 버틸 수 있는 건, 이 대단히 숭고한 일용할 양식이 있기 때문이란 사실이야.
- 지금 우리의 신에 관한 감사를 말하는 건가.
- 난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 아주 일상적인 걸 말하는 거지.
- 그래. 일상적으로도 매우 감사한 일인 건 맞아. 하지만,
- 하지만 뭐지?
- 그걸 숭고하다고까지 말하는 건 지나쳐.
- 아니, 난 하나도 안 지나친데?
- 신에 관한 감사를 말하는 게 아니라면 그게 어떻게 안 지나쳐? 지나쳐. 그리고, 신에 관한 감사의 관점으로 봐도 지나쳐.
-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 김목사. 들어 봐. 밥을 먹는 게, 삼시 세끼를 챙겨 먹는 게 숭고하다고 말하는 거, 우리 인생 전체를 거 뭐랄까 너무 종교적으로 비추는 것 같으니까.
- 아니야. 숭고하다는 게 꼭 종교적일 필요는 없어.
- 종교적일 필요는 없어도 종교적으로 보일 수 있다는 거야. 충분히.
- 그래서 부담스럽다? 그래. 부담스럽다고 생각해도 할 수 없어.
- 아니, 물론 우린 목사니까 그걸 부담스럽다고 말하지 않을 수도 있어. 하지만, 그걸 숭고하다고까지 말하는 건 좀 아니라는 거지.
- 하지만, 주목사. 어쨌든 우리가 삼시 세끼, 일용할 양식을 먹는 건 말이야. 숭고해. 그것도 대단히. 그래서 말이야. 제안할 게 있어.
- 알겠어. 알겠다고. 그래서 뭘 제안한다는 거야?
- 이 밥말이야.
- 밥이 어때서?
- 우리한테 주어진 이 소중한 밥말이지. 우리, 허락받고 먹어야 한다고 생각해. 주목사.
‘허가를 받는다?’, 난 그때, 짧은 순간이지만 생각해 봤다. 우리의 종교적 전통에서 신을 향한 감사 내지는 밥에 관한 감사의 표시로 허가를 받는다는 표현을 쓰는지를. 하지만, 내 종교적 지식이 짧은 탓인지 그런 표현을 사용했는지 선뜻 떠오르진 않았다. 그래서 나는 김목사가 일종의 새로운 종교 프로그램을 제안하려고 하는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나의 의지와 다르게 대화는 영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건 뭐랄까. 맥을 잡지 못하고 흔들리는 목적을 잃은 표류에 가까운 갈등을 닮아 있었다.
- 숭고하기에 우리는 앞으로 한 끼를 먹더라도 허가를 받아야겠어.
- 허가? 누구한테? 신에게?
- 아니, 난 지금 종교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고 했잖아.
- 그럼 … 누구에게? 상징적으로 이 밥을 제작해주신 농민께? 아님, 이 밥을 편하게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해 준 우리의 국가에게?
- 주목사. 내가 말하고 싶은 요점은 다른 데 있어.
- 그 요점이 뭔데?
- 허가를 받아야 하는 대상이 중요한 건 아니야.
- 그럼? 단지, 허가를 받아야만 이 숭고한 감정에 관한 최소한의 해소나 대응이 이뤄질 수 있다 이거야.
- 두 가지 질문이 생겨.
- 두 가지씩이나? 질문해 봐.
- 첫째는 허가를 왜 받아야 하는 지, 여전히 모르겠고, 둘째, 만약 신에게 허가를 받는다는 맥락이 아니라면 누구한테 허가를 받아야 하는지, 그 대상을 알고 싶어.
- …
- 김목사. 왜 대답을 안 하고 날 훤히 쳐다보는 거야?
- 주목사의 그 질문 두 개는 무례해.
- 뭐가 무례해? 왜 무례해?
- 숭고한 감정 앞에서 이 두 질문, 너무 소모적이야.
- 뭐가 소모적인지 모르겠는데, 그럼, 질문을 하지 마?
- 아니, 주목사.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마.
- 아니, 난 결코 감정적이지 않았고, 내가 삼시 세끼 밥을 먹는 것에 왜 허가를 받아야 하며, 그 허가를 받아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알려는 게 잘못된 거라고?
- 맞아. 맞은데, 변하지 않는 건 허가를 받아야만 삼시 세끼를 챙겨 먹을 수 있다는 거야.
- 아니 그러니까. 그 허락을 받아야 할 대상이 누구냐고?
갓 나온 돌솥밥의 파릇파릇한 기운이 사라졌다. 제법 한적한 식당에서 식당 주인은 나와 김목사가 대체 무슨 얘기를 주고받기에 밥 한 숟가락 뜨지 않고 저러는가 싶은 눈빛이었다. 16년 전의 나와 김목사라면 이런 식의 대화에 분명한 목적성과 방향이 있었을 것이다. 우리의 대화는 서로가 하는 일의 이른바 숭고함에 맞추어 종교적이었을 것이고, 충분히 그 숭고함을 주제로 한 제법 열띤 토론이 이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16년 목회 생활 이후, 마주한 상태에서의 우리 대화는 겉으로 보기엔 제법 선문답에 가까웠지만, 그렇다고 긴 여운을 남기는 것도 아니었다. 마치 그것은 내용물 없는 찐빵처럼 본질이 빠져 있거나, 본질을 비켜가고 싶은 성질의 대화였다. 나도, 김목사도 분명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대화는 이어갔고, 돌솥밥은 시간이 갈수록 차갑게 식어갔다. 16년 동안의 종교적 내용, 삶의 무게 역시 돌솥밥처럼 빠르게 식는 느낌이었다.숭고하기에 우리는 앞으로
한 끼를 먹더라도 허가를 받아야겠어.
허가? 누구한테? 신에게?
아니, 난 지금 종교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고 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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