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학적인 돈을 주무르는 기업인, 말 한 마디에 주가가 출렁이는 금융인, 미래를 바꾸는 창업가, 국제정세를 쥐락펴락하는 지도자. [더 비저너리]는 세상의 흐름을 주도하는 파워 리더를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무엇이 현재의 그들을 만들었으며, 어떤 철학과 비전을 가지고 있는지, 그들의 생생한 성공스토리를 전해 드립니다.

이스라엘, 가자지구 공세 끝에 괴멸 목전

네타냐후 “전쟁 멈추지 않아…끝까지 간다”

가자지구에 美주도 임시 행정부 설치 논의

친형 요나탄, 엔테베 작전 유일 전사자 ‘충격’

하버드 박사과정 그만두고 민간 기업 취직

사업 수완 발휘하다 정·재계 인맥 확장

장기집권하며 ‘적 괴멸·국익 극대화’ 추구

팔레스타인 독립보다 하마스와 전쟁 택해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의 군복무 시절. [이스라엘 정부 공보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의 군복무 시절. [이스라엘 정부 공보실]

[헤럴드경제=김수한 기자] 미국의 핵심 동맹국인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근거지인 가자지구 전역 장악을 목전에 두고 있다. 이스라엘은 최근 가자지구 재점령을 목표로 ‘기드온의 전차’ 작전에 돌입, 지난 18일(현지시간) 가자지구 북부와 남부 전역에서 대규모 지상작전 개시를 선언했다. 19일에는 하루 동안 160개의 목표물을 공습했다.

베냐민 네타냐후(76) 이스라엘 총리는 지난 13일 카타르 도하에서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와 휴전 협상도 재개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하마스 괴멸이라는 작전 목표 역시 수행 중이다. 그는 이스라엘 총리실이 공개한 영상에서 “우리는 며칠 내로 작전을 완료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 (가자지구로) 진입할 것”이라면서 “작전 완료란 하마스를 제압하고 파괴하는 것을 뜻한다”고 말했다.

[연합]
[연합]

그는 휴전 협상으로 공격의 고삐가 늦춰지는 걸 우려하기라도 한 듯 “하마스는 아마도 ‘잠깐만, 인질 10명을 더 석방하겠다’고 할지도 모른다”며 “하지만 전쟁을 멈추는 상황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러면서 “일시적 휴전은 좋은 거지만, 우리는 끝까지 갈 것”이라고 괴멸 의지를 재확인했다.

이스라엘 측은 가자지구를 완전히 장악하면 이곳에 미국이 주도하는 임시 행정부를 설치하는 방안을 미국과 논의 중이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미국 측 인사가 수장을 맡은 과도정부가 가자지구의 무장 해제 및 안정화를 완료한 뒤 팔레스타인 정부에 행정권을 다시 넘겨주는 방안이 미국·이스라엘 측 고위 관료들에 의해 논의됐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지난달 29일(현지시간)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현충일 기념식에 참석하고 있다. [로이터]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지난달 29일(현지시간)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현충일 기념식에 참석하고 있다. [로이터]

미국이 2003년 이라크에 설치했던 과도정부 ‘이라크 임시행정처’(CPA)가 참고 사례로 거론되는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은 당시 이라크를 점령, 사담 후세인 정권을 붕괴시키고 과도정부로 CPA를 설립해 운용했다. 당시 CPA는 이라크의 민심을 제대로 돌보지 못해 광범위한 측면에서 비판 받다가 이듬해 구성된 이라크 정부에 행정권을 넘겼다.

임시 행정부에는 팔레스타인 출신 과학·기술 분야 전문가를 기용할 계획이다. 하마스나 서안의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측 인사들은 제외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앞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가자지구를 새롭게 개발해 프랑스 남부 휴양지 리비에라와 같은 명소로 만들겠다는 구상도 밝힌 바 있다.

베냐민 네타냐후(왼쪽) 이스라엘 총리가 지난달 7일(현지시간) 미 백악관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로이터]
베냐민 네타냐후(왼쪽) 이스라엘 총리가 지난달 7일(현지시간) 미 백악관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로이터]

트럼프 대통령은 네타냐후 총리와 지난 2월 4일 백악관에서 정상회담을 가진 뒤 팔레스타인 주민은 요르단이나 이집트 등 인근 국가로 이주시키고 미국이 가자지구를 접수해 개발하겠다는 ‘장밋빛’ 구상을 공표한 바 있다. 네타냐후 총리와 트럼프 대통령의 구상을 종합하면 일단 팔레스타인은 세상에서 없어지는 셈이다.

거인 골리앗을 상대하던 소년 다윗의 나라 이스라엘이 결국 골리앗의 나라를 멸망시키는 수순을 밟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수순의 최종 실행자가 바로 네타냐후 총리다.

베냐민 네타냐후(오른쪽)이스라엘 총리가 1968년 예루살렘 동쪽에 펼쳐진 사막 ‘유대 광야’에서 친구와 함께 찍은 사진. [이스라엘 정부 공보실/게티이미지]
베냐민 네타냐후(오른쪽)이스라엘 총리가 1968년 예루살렘 동쪽에 펼쳐진 사막 ‘유대 광야’에서 친구와 함께 찍은 사진. [이스라엘 정부 공보실/게티이미지]

아버지 따라 대학 교수 되려던 둘째 아들, MIT-하버드서 공부

1949년 10월 21일 이스라엘 수도 텔아비브에서 3형제 중 둘째로 출생한 네타냐후는 아버지처럼 대학 교수가 되고자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형 요나탄(1946년생), 동생 이도(1952년생)와 위아래로 모두 세 살 터울인 베냐민은 군복무 기간을 빼면 1980년대 후반 이스라엘 정계에 데뷔할 때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미국에서 보냈다.

베냐민 네타냐후(오른쪽) 이스라엘 총리가 17세 당시인 1967년 예루살렘 소재 집 앞에서 친구와 함께 찍은 사진. [이스라엘 정부 공보실/게티 이미지]
베냐민 네타냐후(오른쪽) 이스라엘 총리가 17세 당시인 1967년 예루살렘 소재 집 앞에서 친구와 함께 찍은 사진. [이스라엘 정부 공보실/게티 이미지]

부친 벤지온 네타냐후를 따라 1963년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1967년 고교 졸업 후 이른바 제3차 중동전쟁이 터지자 형과 함께 귀국해 군에 입대했다. 1972년까지 6년여간 크고작은 작전에 투입돼 어깨에 총상을 입는 등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

미국으로 돌아와서는 1972년 미국 매사추세츠 공대(MIT)에서 건축학 공부를 시작했다. 1973년엔 이른바 제4차 중동전쟁(욤 키푸르 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 참전했다. 다시 1976년 MIT 슬론 경영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하버드대에서 정치학 박사과정을 시작했지만 그해 실시된 엔테베 작전에서 형의 전사 통지를 받고 학업을 더 이어나갈 수 없는 처지가 됐다.

군복무 시절에는 형 요나탄과 같이 이스라엘군 정예부대 ‘사예레트 마트칼’에서 장교로 근무했다. 사예레트 마트칼은 세계 최고의 특수부대 10개를 꼽을 때 항상 상위에 랭크되는 부대로, 부대원의 신체 능력은 물론 지능까지 뛰어난 것으로 유명하다.

베냐민 네타냐후(오른쪽)가 엔테베 작전에 투입됐다가 영구 장애를 얻은 대원 소린 헤르시코와 1986년 7월 2일 만나 대화하고 있다. [이스라엘 정부 공보실/게티이미지]
베냐민 네타냐후(오른쪽)가 엔테베 작전에 투입됐다가 영구 장애를 얻은 대원 소린 헤르시코와 1986년 7월 2일 만나 대화하고 있다. [이스라엘 정부 공보실/게티이미지]

미 해군 특수전단(네이비씰), 영국 특수공수부대(SAS), 프랑스 국가헌병대(GIGN), 독일 특수군사령부(KSK), 러시아 알파그룹, 중국 특수작전부대, 폴란드 해군특수작전단(GROM), 캐나다 특수작전부대, 한국 707특수임무단과 함께 세계 최고의 10대 특수부대로 꼽힌다.

미 최고 명문대인 MIT와 하버드대를 다닌 베냐민은 지능은 물론 신체 능력 또한 출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형이 사망한 엔테베 작전 소식이 날아든 1976년, 그는 하버드대에서 정치학 박사과정을 그만두고 보스턴컨설팅그룹(BCG)에 입사한다.

엔테베 작전은 이스라엘 정부가 팔레스타인 테러조직에 납치된 이스라엘인들을 구출하기 위해 우간다 엔테베 국제공항에 특수부대를 투입한 작전이다. 작전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투입 요원 중 전사자는 단 한 명이었는데, 그 전사자가 작전을 진두지휘한 베냐민의 형 요나탄 중령이었다. 형제이자 전우인 형 요나탄의 전사 소식은 팔레스타인에 대한 베냐민의 적개심을 활활 타오르게 하는 불쏘시개가 됐다.

형 전사 통보 받고 학업 중단…외교관·정치인으로 보폭 넓혀

베냐민은 대학 졸업 후 입사한 BCG에서 훗날 미국의 대통령 후보급 거물 정치인으로 성장하는 밋 롬니와 함께 근무하기도 했다. 롬니는 훗날(2012년) 공화당 대선후보로 출마했지만, 민주당 후보인 버락 오바마에게 낙선했다.

민간 기업에서 일하던 베냐민은 1978년 다시 귀국해 형과 자신의 이름을 딴 요나탄-네타냐후 반테러연구소라는 비정부기구를 설립, 운영했다. 1980~1982년에는 ‘림 인더스트리’의 마케팅 국장을 맡아 모셰 아렌스 등 이스라엘 정치인들과 교분을 맺게 된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1984~1988년 주유엔 이스라엘 대사로 재직 중 발표하고 있다. [AFP/게티이미지]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1984~1988년 주유엔 이스라엘 대사로 재직 중 발표하고 있다. [AFP/게티이미지]

그의 정치적 수완은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아렌스는 자신이 주미 이스라엘 대사로 부임하자 베냐민을 대사관 공관 부국장으로 뽑아 데리고 간다. 베냐민은 1984~1988년 주유엔 대사를 맡으며 두각을 나타낸다. 1988년에는 국회의원에 당선되며 정치인으로 커리어를 넓혀나갔다. 당시 이츠하크 샤미르 총리가 이끄는 내각에서 각료를 맡기도 했다.

1993년에는 리쿠드당 대표로 선출됐다. 그해는 시몬 페레스 이스라엘 외무장관과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의장은 ‘땅과 평화를 교환한다’는 원칙에 합의, 일명 오슬로 협정을 체결한 역사적인 해였다. 오슬로 협정은 양측이 최초로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수십년간 지속된 갈등의 종식을 약속한 합의로 1993년 9월 13일 체결됐다. 이 협정에는 ‘1999년 5월까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 영토를 인도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가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과 1996년 9월 가자지구에서 만나 악수하고 있다. [이스라엘 정부 공보실]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가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과 1996년 9월 가자지구에서 만나 악수하고 있다. [이스라엘 정부 공보실]

당시 양측의 갈등은 끊이지 않고 있었다. 1994년 2월 25일에는 이스라엘 극우층이 팔레스타인 요르단강 서안 지구 최대 도시인 헤브론에서 이슬람 사원에 총격을 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로 인해 사원에 있던 팔레스타인 사람들 수십명이 집단 학살을 당했고, 희생자 측은 다시 이스라엘에 보복을 기도하는 악순환이 일상이 됐다.

역사적 오슬로 협정으로 노벨평화상까지 수상했지만…‘총리 암살’ 후폭풍

1994년 10월에는 그러한 흉흉한 분위기 속에서 오슬로 협정 체결을 주도한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와 페레스 외무장관, 아라파트 의장이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됐다는 낭보가 전해졌다. 그만큼 확전을 우려하는 전 세계의 불안한 시선이 이곳으로 모이고 있었다는 의미다. 한 번에 노벨평화상이 3명에게 주어진 건 노벨상 역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하지만 역시나 후폭풍은 만만치 않았다.

1995년 11월 4일 이 협상을 주도한 라빈 총리가 자국의 극우 청년 이갈 아미르에 의해 암살됐다. 자국 극우층이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 영토를 떼어주는 것에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해 자국 총리를 암살하는 도를 넘는 불상사가 발생한 것이다.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가 1980년 자신의 딸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스라엘 정부 공보실/게티이미지]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가 1980년 자신의 딸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스라엘 정부 공보실/게티이미지]

이어 1996년 실시된 총선 전후로 팔레스타인이 배후로 의심되는 테러도 잇달아 발생하고 있었다. 야당 당수인 네타냐후는 극도의 시온주의자이자 팔레스타인을 향한 초강경주의자적 정체성을 확립, 강화해 가고 있었다. 이런 그의 태도는 당시 온건파로 분류되던 현직 시몬 페레스 총리를 1% 포인트 차이로 꺾는데 상당한 기여를 한 것으로 보인다.

47세의 어린 나이로 총리에 당선된 베냐민은 이스라엘 정계에서 새 역사를 쓰며 전성기를 향해 질주했다. 일단 그는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건국 이후 이스라엘 영토에서 태어난 최초의 총리였고, 사상 최연소 이스라엘 총리이기도 했다. 강경주의자인 그는 집권 초기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대통령과 대립하기도 했으나, 나중에는 그와 와이리버 협정을 체결한 장본인이기도 했다.

1997년 10월 미국 버지니아주의 소도시 와이리버에서 미국과 요르단의 중재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측간에 체결된 와이리버 협정은 4년 전 체결된 오슬로 협정의 정신을 계승하면서 그 구체적 실행방안을 담은 협정이다.

최연소 총리 네타냐후, 초강경주의자이지만 와이리버 협정 맺었다가 실각

이 협정으로 팔레스타인은 요르단강 서안 40%의 자치영역을 확보했고, 그 대신 팔레스타인 헌장에서 ‘이스라엘 파괴’ 규정을 삭제한다. 그야말로 오슬로 협정의 정신대로 ‘땅을 주고 평화를 얻은’ 셈이었다. 오슬로 협정으로 라빈 총리가 암살당했다면, 와이리버 협정 이후 응징 대상은 네타냐후가 될 차례였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지난달 29일(현지시간) 이스라엘 헌충일 기념식에서 연설하고 있다. [로이터]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지난달 29일(현지시간) 이스라엘 헌충일 기념식에서 연설하고 있다. [로이터]

예상대로 베냐민은 이 협정 체결로 극우파의 신임을 잃고, 부패 스캔들에 연루되는 등 불상사까지 겹쳐 1999년 총리 선거에서 노동당의 에후드 바라크에게 패배한다. 이후 잠시 휴식기를 가진 그는 아리엘 샤론 정권의 각료로 복귀해 2002년 외무장관, 2003년 재무장관 등을 역임한다.

2005년에는 샤론 총리가 리쿠드당을 탈당하고 새 정당 ‘카디마’를 창당하자 그해 12월 다시 리쿠드당의 대표로 선출된다. 2006년 총선에서는 카디마당과 격돌하지만 패배해 제1당 자리를 내준다. 야당 당수가 된 베냐민은 ‘이란 핵시설 선제공격론’ 등을 앞세우며 강경 우파 정치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더욱 강화한다.

2009년 2월 조기 총선에서도 역시 카디마당에 1석 차이로 제1당 자리를 내줬으나, 노동당 등과 연정을 구성해 다시 총리직에 오른다. 이때부터 2021년까지 5연임했고, 2021년 물러났지만 2022년 말 다시 총리에 올라 현재까지 7선째 초장기 집권 중이다.

극우 시온주의자이자 팔레스타인 초강경주의자인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가 장기 집권을 통해 얻은 지혜는 이스라엘의 국익을 위해 팔레스타인이 절대로 독립국 지위를 국제사회로부터 승인받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네타냐후는 이 아이디어를 관철하고자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실권을 갖지 못하도록 다양한 꼼수를 썼다. 대표적인 예로 자치정부 대신 이슬람주의 무장정파 하마스가 실권을 장악하도록 이스라엘이 측면에서 지원하기도 했다.

이스라엘 공격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거주하는 가자지구가 초토화된 이후 현지 주민들이 지난 12일(현지시간) 봉사단체로부터 뜨거운 음식을 전달받고 있다. [AFP]
이스라엘 공격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거주하는 가자지구가 초토화된 이후 현지 주민들이 지난 12일(현지시간) 봉사단체로부터 뜨거운 음식을 전달받고 있다. [AFP]

미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유럽연합(EU)은 이스라엘의 하마스 자금 지원을 비난한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팔레스타인 국가 설립을 막으려면 하마스를 지원해야 한다”는 네타냐후의 발언을 전하기도 했다. 미 일간지 뉴욕타임스(NYT)도 ‘네타냐후가 우리를 재앙으로 내몰고 있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정부는 부담이지만 하마스는 자산’이라고 결론내리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평화롭게 방관하는 것보다는 하마스에 실권을 넘겨 연일 그들과 무장투쟁을 벌이는 것이 오히려 이스라엘의 국익에 부합하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양측의 적대적 공생 관계는 시간이 갈수록 네타냐후 총리가 그린 그림에 가까이 다가서고 있다.

하마스는 2023년 10월 7일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 국경 지역을 공격해 1300여명의 생명을 빼앗고 250여명을 납치했다. 이는 같은해 4월 5일 이스라엘 극우주의자들이 유대교 축일을 기념해 이슬람 모스크를 급습해 350여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감금한 것이 발단이었다.

베냐민 네타냐후가 걸어온 길
베냐민 네타냐후가 걸어온 길

하지만 이스라엘은 하마스의 대규모 공격을 계기로 팔레스타인에 전쟁을 선포하고 가자지구 전체를 초토화시켰다. 가자지구 보건부에 따르면 2023년 10월 전쟁 발발 이후 팔레스타인 사망자는 5만3486명, 부상자는 11만2000여명으로 집계됐다. 네타냐후 총리 입장에서 이스라엘은 계획대로 하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