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시보, 1996년 데뷔 앨범 ‘플라시보’(Placebo) 발매

젠더 경계를 허문 성(性) 혁명적 페르소나, 유럽 내 폭발적 반응 이끌어

브릿팝 중심 시장서 ‘대안적 정서’로 주목…‘지나친 스타일리즘’ 비판도

음악을 사랑하는 당신이라면 좋아할 수 밖에 없는 콘텐츠

“Since I was born I started to decay”

(태어난 순간부터, 나는 썩어가기 시작했어)

- 플라시보, ‘10대의 분노’(Teenage Angst) -

플라시보는 1996년 데뷔 당시 영국 음악씬의 흐름과 거의 모든 면에서 대조를 이루었는데, 음악적으로는 브릿팝 특유의 구조화된 사운드 대신 불안정한 리듬, 의도적인 음계 탈선, 낮고 축축한 톤의 기타 편곡을 중심에 두며 차별성을 띄었으며 가사 또한 기존 브릿팝 밴드의 청춘, 도시적 삶, 계급 감각 등의 일상적 주제와는 달리 자기혐오, 중독, 성적 혼란, 우울감, 고립감을 중심으로 삼았다.[인스타그램 갈무리]
플라시보는 1996년 데뷔 당시 영국 음악씬의 흐름과 거의 모든 면에서 대조를 이루었는데, 음악적으로는 브릿팝 특유의 구조화된 사운드 대신 불안정한 리듬, 의도적인 음계 탈선, 낮고 축축한 톤의 기타 편곡을 중심에 두며 차별성을 띄었으며 가사 또한 기존 브릿팝 밴드의 청춘, 도시적 삶, 계급 감각 등의 일상적 주제와는 달리 자기혐오, 중독, 성적 혼란, 우울감, 고립감을 중심으로 삼았다.[인스타그램 갈무리]

[헤럴드경제=김주리 기자] ‘예술가는 작품을 통해 자기자신을 고백한다’고 가정했을 때, 작품은 예술가의 내면(자아)을 탐색할 수 있는 장치가 된다. 그로 인해 우리는 작품을 매개로 예술가의 내면과 연결돼 그 안에서 공감 혹은 감동, 때로는 동질감을 느끼며 작품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기쁨과 희열을 느끼기도 하고, 때로는 눈물을 흘리고, 때로는 위안을 받는다.

하지만 만약 그 고백조차 철저히 연기된 것이라면? ‘진정성’이 담겼다고 믿었던 작품이 사실은 예술가의 자아와는 관계없이 완벽하게 위장되고 변조된 것이라면, 감상자가 느낀 타인(예술가)과의 연결에서 온 위로와 공감들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할까. 작품의 내적 성질이 창작자의 가면(假面)에 불과했다고 한들, 감상자가 느낀 심리적 치유와 만족감은 부정될 수 없다. 감흥은 분명히 발생했고, 작품은 실존했다. 다만 그 작품의 ‘성분’이라 여겼던 진정성과 진실성이 애초부터 연출된 것이었을 뿐이다. 감상자에게는 타인과 연결됐다는 일종의 ‘심리적 착시’ ,‘위약 효과(Placebo effect)’가 발생한 것이다.

1994년 영국 런던에서 결성된 밴드 플라시보(Placebo)의 정체성은 단순한 듯 복잡하다. 여성성과 남성성이 공존하고, 냉소와 열정이 혼합돼있으며 우울과 희열이, 한계와 절제가 작위적인 듯 진실되게 존재한다. 그리고 이는 어쩌면, 이들이 스스로의 ‘자기혐오’를 위장된 형태로 표현함으로써 자신들이 만든 작품에 집어삼켜지지 않도록 제어하는, 가장 성숙한 형태의 생존 방식일지도 모른다.

“And if you‘re ever around in the backstreets or the alleys of this town

Be sure to come around

I‘ll be wallowing in pity, wearing a frown, like Pierrot the clown”

(혹시 이 도시의 뒷골목이나 어두운 골목길 어딘가에 온다면

꼭 나를 만나러 와줘

난 피에로처럼 자기연민에 빠져 얼굴을 찌푸리고 있을거야)

- 플라시보, ‘피에로’(Pierrot the Clown) -

1994년 영국 런던에서 결성된 밴드 플라시보(Placebo)의 정체성은 단순한 듯 복잡하다. 여성성과 남성성이 공존하고, 냉소와 열정이 혼합돼있으며 우울과 희열이, 한계와 절제가 작위적인 듯 진실되게 존재한다. [게티이미지/Paul Bergen]
1994년 영국 런던에서 결성된 밴드 플라시보(Placebo)의 정체성은 단순한 듯 복잡하다. 여성성과 남성성이 공존하고, 냉소와 열정이 혼합돼있으며 우울과 희열이, 한계와 절제가 작위적인 듯 진실되게 존재한다. [게티이미지/Paul Bergen]

브릿팝 시대의 중심에서 ‘파격’을 외치다…‘매혹적이거나, 작위적이거나’

플라시보의 등장은 확실히 파격적이었다. 이들이 데뷔한 1996년은 오아시스(Oasis), 라디오헤드(Radiohead), 블러(Blur) 등이 주도한 브릿팝(Britpop)이 ‘예측 가능한 사운드’의 장르로 고착화되면서 다소 상업적 피로감이 누적되던 시기이긴 했지만, 엄연히 브릿팝의 황금기 중 ‘후반기’에 속해있던 시기였다. 1960~1970년대 록의 전통에 뿌리를 둔, 오아시스로 대표되는 남성적이고 호쾌한 감성과, 블러의 유쾌하지만 삐딱한 풍자적인 음악 스타일은 여전히 시장을 지배하고 있었고, 이는 곧 ‘영국적인 정체성’을 상징할 정도의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반면 플라시보는 이 같은 흐름과 거의 모든 면에서 대조를 이루었는데, 음악적으로는 브릿팝 특유의 구조화된 사운드 대신 불안정한 리듬, 의도적인 음계 탈선, 낮고 축축한 톤의 기타 편곡을 중심에 두며 차별성을 띄었으며 가사 또한 기존 브릿팝 밴드의 청춘, 도시적 삶, 계급 감각 등의 일상적 주제와는 달리 자기혐오, 중독, 성적 혼란, 우울감, 고립감을 중심으로 삼았다.

이미지적인 면에서도 상당히 이질적이었다. 사실상 플라시보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는 프론트맨 브라이언 몰코(Brian Molko·기타/보컬)는 자신의 중성적 외모에 젠더 유동적인 의상, 과장된 메이크업을 입혀 스스로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았고, 이는 1990년대 록 씬에서 드물게 ‘남성성의 해체’를 드러낸 사례였다.

다만 당시 평단과 대중의 반응은 양측으로 갈렸는데 “불편하지만 지나치게 매혹적”, “허물어져가는 브릿팝의 새로운 대안”, “현 시대의 데이빗 보위(David Bowie)”라는 평가와 동시에 “작위적이고 인공적인 캐릭터 설정”, “스타일 과잉”이라는 평이 공존했다.

그렇다면 플라시보의 의도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플라시보의 음악적인 정체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들을 어떤 의미의 선상에 두고 파악해야 할까? 이들의 음악은 적나라하게 드러난 자아의 표현일까 혹은 자아를 감추기 위해 만들어진 과장된 페르소나에 불과할까?

“I was alone, falling free

Trying my best not to forget

What happened to us, what happened to me

What happened as I let it slip”

(나는 홀로, 온 힘을 다해

우리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지,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지

내가 놓친 것이 무엇인지 망각하지 않으려 애쓰며

한없이 추락하고 있었다)

- 플라시보, ‘약물’(Meds) -

브라이언 몰코는 비단 노래에서 뿐 아니라 의상과 무대에서의 몸짓, 인터뷰, 시선 처리, 언론과 적당한 거리 유지 전략 등 의도된 연출을 통해 스스로 형상화된 자기자신을 ‘조형물’의 형태로 굳혀갔다. 그리고 이 형상을 반복적으로 무대, 미디어, 음악을 통해 ‘전시’하는 방법을 이용해 캐릭터를 하나의 완성된 ‘미학적 오브제’로 발전시켰다. [게티이미지]
브라이언 몰코는 비단 노래에서 뿐 아니라 의상과 무대에서의 몸짓, 인터뷰, 시선 처리, 언론과 적당한 거리 유지 전략 등 의도된 연출을 통해 스스로 형상화된 자기자신을 ‘조형물’의 형태로 굳혀갔다. 그리고 이 형상을 반복적으로 무대, 미디어, 음악을 통해 ‘전시’하는 방법을 이용해 캐릭터를 하나의 완성된 ‘미학적 오브제’로 발전시켰다. [게티이미지]

자기 캐릭터화로 완성된 ‘미학적 오브제’…연극인가 실재인가, 착시인가 현실인가

브라이언 몰코의 자기 캐릭터화를 단순히 눈에 띄기 위해 의미없이 만들어 낸 ‘예쁜 남자 설정’ 정도로 단정하는 건 지나친 비약이다. 그들의 음악 속 혹은 무대 위에서의 브라이언 몰코라는 캐릭터는 이들의 음악 스타일과 가사와 긴밀하게 연결돼있으며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각도의 해석이 필요하다.

플라시보 음악 중 대표곡 중 하나로 꼽히는 ‘낸시 보이’(Nancy Boy)는 이들의 데뷔 앨범에 수록된 곡으로 브라이언 몰코가 페르소나로 변모하는 과정이 일부 묘사돼있다. “역할이 바뀌는 순간, 모든 게 무너져. 내 머릿 속 뮤즈, 그녀는 가장 보편적인 존재야. 날 빙빙 돌리며 내 안으로 들어오지(And it all breaks down at the role reversal, Got the muse in my head, she’s universal, Spinning me round, she’s coming over me”에서 이어지는 “수줍고 귀여운 척 다가오는, 결국 또 하나의 ‘낸시 보이’(여성의 흉내를 내는 남성)(Comes across all shy and coy, Just another nancy boy)” 구절은 브라이언 몰코가 고의적이고 계산된 방식으로 ‘음악 속 자아’를 자기 손으로 구축했다는 점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이후 브라이언 몰코는 비단 노래에서 뿐 아니라 의상과 무대에서의 몸짓, 인터뷰, 시선 처리, 언론과 적당한 거리 유지 전략 등 의도된 연출을 통해 스스로 형상화된 자기자신을 ‘조형물’의 형태로 굳혀갔다. 그리고 이 형상을 반복적으로 무대, 미디어, 음악을 통해 ‘전시’하는 방법을 이용해 캐릭터를 하나의 완성된 ‘미학적 오브제’로 발전시켰다.

이 같은 방식을 통해 플라시보의 감각은 고통도, 폭력도, 자학도 ‘고백’이 아닌 ‘연출’로 표현되는데, 자기자신의 감정과 자아를 직접적으로 표출하는 것이 아닌, ‘배우화’된 브라이언 몰코가 실재 그로 인해 표현된 감정을 연극적으로 ‘재현’하는 방식을 갖게 되는 것이다.

“Like the naked leads the blind

I know I‘m selfish, I’m unkind

Sucker love I always find

Someone to bruise and leave behind”

(벌거벗은 자가 눈 먼 맹인을 이끄는 것처럼

나는 내가 이기적이고 상냥하지 않다는 걸 알아

속물 같은 사랑, 그렇기에 나는 언제나

내가 상처 입힌 뒤 떠나버릴 상대를 찾아내지)

- 플라시보 ‘에브리 미 에브리 유’(Every You Every Me) -

브라이언 몰코는 과거 헤로인을 포함한 각종 마약에 손을 대며 자기파괴적인 삶을 살던 당시 수없이 자살 충동을 느낀 적이 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즉, 브라이언 몰코가 의도적으로 ‘예술 속 자아’를 스스로와 분리시키는 작업은 어떤 의미로는 ‘만들어진 자아를 내세움으로써  자신의 작품(음악)에 잠식당하지 않기 위한, 일종의 그만의 ‘생존 방식’인 셈이다.[게티이미지/Andy Willsher]
브라이언 몰코는 과거 헤로인을 포함한 각종 마약에 손을 대며 자기파괴적인 삶을 살던 당시 수없이 자살 충동을 느낀 적이 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즉, 브라이언 몰코가 의도적으로 ‘예술 속 자아’를 스스로와 분리시키는 작업은 어떤 의미로는 ‘만들어진 자아를 내세움으로써 자신의 작품(음악)에 잠식당하지 않기 위한, 일종의 그만의 ‘생존 방식’인 셈이다.[게티이미지/Andy Willsher]

자기파괴로 이어지지 않은 자기혐오…예술적 표현의 ‘한계’ 혹은 영리한 ‘거리두기’

플라시보를 반복해서 집중적으로 듣다 보면 이들이 비정상적 정체성과 보편적이지 않은 불쾌한 정서를 전면에 드러내고 있음에도, 사운드 그 자체는 상당히 절제되고 균형있는 방식으로 표현되고 있는 걸 발견하게 된다. 우울하고 혼란스러운 감정을 주제로 하지만, 그 감정이 감상자의 의식을 혼란에 빠뜨릴 정도는 아니며, 복잡하고 부정적인 감정들은 설계된 사운드 안에 정돈된 방식으로 표현된다. 즉, 이들은 ‘불안’을 다루지만, 이들의 음악은 ‘불안정’하지 않다.

이는 엘리엇 스미스(Elliot Smith), 커트 코베인(Kurt Cobain), 에이미 와인하우스(Amy Winehouse)의 경계없는 감정 몰입으로 시작해 ‘자아 붕괴→현실 고립→감정과 작품에 완전히 일체’가 되는 단계와는 명확히 구분되는데, 이는 브라이언 몰코가 ‘음악 속 자아’와 ‘실재 자아’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둔 채 감정을 통제하는 방식을 활용한 결과다.

브라이언 몰코는 과거 헤로인을 포함한 각종 마약에 손을 대며 자기파괴적인 삶을 살던 당시 수없이 자살 충동을 느낀 적이 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즉, 브라이언 몰코가 의도적으로 ‘예술 속 자아’를 스스로와 분리시키는 작업은 어떤 의미로는 ‘만들어진 자아를 내세움으로써 자신의 작품(음악)에 잠식당하지 않기 위한, 일종의 그만의 ‘생존 방식’인 셈이다.

“The moment‘s passed you by

Now is the rest of your life

I‘m a cavalcade that tumbles one by one

But I‘m okay, just like Jesus’ Son”

(순간은 이미 너를 통해 지나갔어

지금은 네 삶의 남아있는 부분이야

난 차례차례 무너지는 퍼레이드와도 같지만

그래도 괜찮아, 예수의 후손처럼 말이지)

- 플라시보, ‘예수의 후손’(Jesus’ Son) -

플라시보의 자기혐오 감정은 자기파괴로 이어지지 않았다. 이는 어쩌면 작품과 ‘물아일체’ 상태에 이르지 못한, 예술적 자아를 전면적으로 개방하지 못한 창작자로서의 한계일 수도 있고, 혹은 쏟아지는 감정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거리두기’일 수도 있다. 어찌됐든 이들은 자신들의 작품에 갇히지 않았고, 최근까지 신보를 발매하며 전국 투어를 이어가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게티이미지/Stuart Mostyn]
플라시보의 자기혐오 감정은 자기파괴로 이어지지 않았다. 이는 어쩌면 작품과 ‘물아일체’ 상태에 이르지 못한, 예술적 자아를 전면적으로 개방하지 못한 창작자로서의 한계일 수도 있고, 혹은 쏟아지는 감정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거리두기’일 수도 있다. 어찌됐든 이들은 자신들의 작품에 갇히지 않았고, 최근까지 신보를 발매하며 전국 투어를 이어가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게티이미지/Stuart Mostyn]

플라시보가 택한, 선을 넘지 않는 ‘감정적 방어 전략’은 실제로 유효하게 작동된 듯하다. 비슷한 주제의 감정을 극단적으로 표현하며 마침내 스스로의 삶을 마감한 뮤지션들과 비교했을 때, 플라시보의 자기혐오 감정은 자기파괴로 이어지지 않았다. 이는 어쩌면 작품과 ‘물아일체’ 상태에 이르지 못한, 예술적 자아를 전면적으로 개방하지 못한 창작자로서의 한계일 수도 있고, 혹은 쏟아지는 감정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거리두기’일 수도 있다. 어찌됐든 이들은 자신들의 작품에 갇히지 않았고, 최근까지 신보를 발매하며 전국 투어를 이어가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브라이언 몰코는 지난 2009년, Les Inrockuptibles라는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의도적으로 나 자신을 과장된 캐릭터로 표현했다”며 “자신감을 가장한 인물을 만들어냈으며, 이는 자신감 부족과 자기혐오를 숨기기 위한 방법이었다”고 설명한 바 있다.

플라시보의 음악은 ‘만들어진 자아’의 자기고백이며 이들의 음악으로 받는 공감과 동질감은 실제로 ‘위약 효과’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렇다면 플라시보의 음악을 통해 감상자가 얻은 ‘심리적 치유’는 허상으로 간주할 수 있을까? 진정성 없는 예술은 위선일까?

예술을 통한 자기 치유 효과의 핵심은 작품의 ‘진위 여부’ 그 자체가 아니다. 즉, 이들의 음악이 객관적으로 진실성이 있었느냐의 문제가 아닌, 감상자가 이들의 작품을 통해 무엇을 감지했느냐가 먼저다. 작품은 창작가의 손을 떠난 순간 감상자의 것이 된다.

“태어난 순간부터 썩어가기 시작했다”라는 처절한 자기혐오의 감정을 통과하며, 그리고 그 고통을 창작가로서 음악으로 승화시켰음에도 플라시보는 살아남았고 대중은 이들의 음악에 감흥하며 심리적 위안을 받았다. 치유는 언제나 ‘진짜 약’에서만 비롯되지 않는다. 때로는 플라시보야말로 가장 효율적인 치료제다. 좀 더 확장된 시각에서 본다면, 우리가 믿고 반응하는 의식 자체가 일종의 거대한 플라시보에 불과할 지도 모를 일이니.


rainbow@heraldcorp.com